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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道學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67
발행연도
2012.9
수록면
159 - 199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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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3세기 중엽부터 4세기대까지 일관되게 평양성을 정치적 거점으로 중시하였다. 이 같은 고구려 남방 정책의 계승선상에서 광개토왕은 남방 진출을 본격화하였다. 그러한 광개토왕대 진출 방향이 凝結된 자료가 광개토왕릉비문이었다. 능비문을 통해 광개토왕 일대의 總戰果가 오로지 백제로부터 빼앗은 城에만 국한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당시 백제는 倭 세력을 끌어들였다. 게다가 백제는 고구려와 接境한 後燕과도 연계하였다. 400년에 광개토왕이 派兵한 신라 구원전은 高句麗=新羅, 그리고 百濟=倭=任那加羅=後燕이 개입한 대규모 국제전으로 파악되었다. 이때의 출병으로 고구려군은 倭軍을 격파하기는 했지만, 後燕의 기습 공격을 받아 당초의 企劃이 어긋난 관계로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400년의 南征으로 인해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한 것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신라는 그 직후 倭와도 ‘通好’했을 뿐 아니라 質까지 파견했다. 광개토왕이 백제 정벌의 명분으로 간주했던 것이 倭와의 ‘和通’이었다. 신라의 이러한 모순된 행위는 고구려군의 400년 출병 자체가 실패했음을 반증해 준다.
倭는 근초고왕대의 修好國인 백제를 지렛대로 한반도 정세에 깊이 개입했다. 倭는 고구려의 이해와 충돌했던 관계로 가장 격렬한 전투를 치른 대상으로 남아 있다. 이는 고구려가 설정한 官的 秩序와 倭의 利害가 정면 충돌한 결과였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광개토왕대의 進出 方向과 官的 秩序
Ⅲ.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
Ⅳ.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Ⅴ. 고구려와 任那加羅의 관계
Ⅵ. 고구려와 倭의 관계
Ⅶ.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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