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노중국 (계명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66
발행연도
2012.6
수록면
253 - 285 (33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6세기 초반 백제 무령왕은 축소된 경제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대가야의 영역인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대가야 이뇌왕은 522년에 신라와 결탁하고 결혼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신라는 529년에 이 혼인관계를 깨고 도리어 대가야의 성을 점령하여 버렸다. 이로써 이뇌왕의 친신라 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뇌왕이 죽자 친백제 정책을 추구하던 세력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이뇌왕의 아들 월광 대신 가실왕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가실왕은 이뇌왕의 동생으로 추정된다.
즉위 후 가실왕은 이뇌왕의 친신라정책으로 말미암아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기 위해 우륵으로 하여금 가야금을 만들게 하고 또 작곡을 하게 하였다. 이는 문화를 통해 사회를 통합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한편 가실왕은 대외적으로 백제와 신라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는 세력 균형 정책을 취하여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가실왕이 죽은 후 아들 도설지왕이 즉위하였다. 도설지왕은 부왕의 통합 정책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음란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가실왕을 도와 통합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던 우륵은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으로 판단하고 신라로 망명하였다. 신라 진흥왕은 우륵의 망명을 받아들이고 가야금곡을 국가 음악으로 삼았다. 이로써 가야금이 오늘날 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導論
Ⅱ. 異腦王의 親신라 정책 추진과 그 실패
Ⅲ. 嘉悉王의 즉위와 정책의 변화
Ⅳ. 우륵의 입장과 신라로의 망명 : 맺음말에 대신하여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3)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3-911-003347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