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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金皓東 (영남대학교)
저널정보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연구 인문연구 제63호
발행연도
2011.12
수록면
211 - 252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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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토리번(鳥取藩)의 藩士 오카지마 마사요시(岡嶋正義, 1784~1858) 가 편찬한 『竹島考』는 竹島가 조선에 가깝고 풍요한 땅이지만 오랫동안 폐도였다고 인식하고 있다. 오카지마는 폐도가 된 이유를 왜구와 임진왜란 등으로 인해 유약한 조선인들이 일본을 두려워하여 폐도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 폐도인 竹島를 에도 중기에 호키국(伯耆國)에서 열어 호키국의 영지처럼 여겼다고 판단하였다.
오카지마는 竹島를 울릉도와 전혀 다른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당시 그가 인용한 울릉도에 관한 사료를 울릉도에 관한 사료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일본에 속한 또 다른 하나의 가상의 섬으로서의 ‘竹島’를 상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竹島考』는 사료로서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오카지마가 竹島를 울릉도로 인식하지 못하고, 또 되찾아 와야 한다는 편향된 시각을 갖게 된 것은 오야, 무라카와 가문이 평상시 조선의 울릉도에 어채활동을 한 것을 본국에 알리지 않았고, 조선의 울릉도가 아닌 무인도인 竹島를 개척하였다고 하면서 그들만이 어로활동을 독점한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에도막부에 호키국의 영지라고 하면서 토관이 파견되었다는 거짓말 보고를 한 자료들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카지마의 인식을 통해 일본 에도막부와 대마도가 ‘竹島一件’이라는 잘못된 영토분쟁을 일으키는 정책을 채택하였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竹島考』등에 바탕한 일본의 고유영토설, 즉 17세기 중엽 영윤권 확립설은 문제가 있음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竹島考』 편찬 목적과 引用書目의 분석
3. 『竹島考』 내용의 분석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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