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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윤소영 (독립기념관)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1집
발행연도
2012.4
수록면
5 - 43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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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2월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 현에 영토 편제한 근거는 독도가 무인도로 타국이 점령했다고 인정할만한 형적이 없고 1903년부터 나카이요사부로(中井養三郞)가 이 섬에 이주하여 어업에 종사한 것이 국제법상 점령사실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 연구의 목적은 1900년대 초 일본의 조선어업 조사 자료를 통해 당시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써 한국 영토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것이다.
1889년 한일통어규칙이 제정된 후 일본은 일본어선의 조선 연해 조업을 장려했다. 1901년 일본에서의 어업법 제정을 전후하여 일본 측은 본격적으로 조선의 수산자원을 파악하기 위한 현지조사를 실시했다. 그 조사 보고서에는 울릉도와 독도(양코도)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외국 주재 일본 영사의 보고에 토대한 『통상휘찬』에 수록된 「울릉도사정」(1902)과 대륙침략단체인 흑룡회에서 펴낸 『한해통어지침』(1903), 1904년 제1차 한일의정서 체결 후 한국에 부임한 메카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지휘한 한국재정고문본부가 펴낸 『한국 수산행정 및 경제』(1905)에는 일관되게 울릉도 항목에 독도(양코도)를 기술하였다.
이 자료에 의하면 첫째, 이 무렵 울릉도의 조선인과 일본인은 독도를 「량코도」 또는 「양코도」로 불렀다. 조선정부가 울릉도에 개척민을 보낸 것은 공식적으로 1883년부터였고 그 후 일본인도 울릉도에서 와서 계절적인 어로활동에 종사했다. 그래서 일본에서 독도를 부르던 명칭인 ‘량(양)코도’가 울릉도의 조선인 사이에서도 인지되어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울릉도를 근거지로 하여 독도(양코도)에 4~5일 정도 체류하는 어로활동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전복 등을 채취하였으며 1904년경에는 강치어업도 이루어졌다. 비록 이러한 어로활동의 주체가 일본인이었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울릉도를 母島로 하여 독도에서의 조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셋째, 『한해통어지침』(1903)에는 맑은 날 독도(양코도)가 보인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측이 울릉도에서는 독도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을 논박할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하다. 넷째, 메카다 다네타로가 지휘한 한국재정본부가 펴낸 『한국수산행정 및 경제』(1905)는 효과적으로 조선의 수산자원을 개발·수탈하기 위한 정책제안서인데, 일본 측 관변자료이므로 한국의 독도 영토주권을 입증하는 데에 활용될 수 있는 주요 자료이다.

목차

1. 머리말
2. 『通商彙纂』의 독도(량코도) 기술
3. 『한해통어지침』의 독도(양코도) 기술
4. 『韓國水産行政及經濟』의 독도(양코도) 기술의 의미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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