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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노대환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19집
발행연도
2011.12
수록면
277 - 311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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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행임은 조선의 대표적인 충절 가문 출신으로 정조의 돈독한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정조는 윤행임 가문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윤행임의 학문적 잠재력을 인정하여 그를 근신으로 양성하였다. 윤행임은 정조의 관심과 지도를 받으며 관료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윤행임은 자신의 가문과 학문을 인정했던 정조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윤행임은 정조의 유지를 실천하는 것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자파 중심으로 정치 구도를 재편하려던 벽파에게 이러한 윤행임의 태도는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벽파가 본격적으로 권력 장악에 나서면서 양측의 갈등은 증폭되었고 윤행임은 결국 정조의 유지를 빙자하여 권력을 농단한 역신으로 몰려 40세의 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윤행임을 제거했던 벽파 정권은 순조 초반에 무너졌지만 그의 관작은 쉽게 복구되지 못하였다. 복관 반대론자들은 윤행임이 벽파를 도와 일을 꾸민 자라고 지목하면서 복관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로 인해 복관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6년이 지난 1835년(헌종 1)나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벽파로부터는 자파 세력을 위협하는 인물로 배척받아 목숨을 잃고 벽 파가 무너지자 이번에는 거꾸로 벽파에 동조한 인물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던 윤행임의 정치적 행보는 여전히 안개에 싸여 있다. 그의 학문적 성향 역시 해명되지 못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는 기본적으로 호론을 지지하였지만 정책 추진 과정에서는 서얼 허통 주장처럼 낙론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이러한 문제는 차후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관련 연구의 진척에 따라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요약문
머리말
1. 윤행임 가문의 행보
2. 정조대 윤행임의 출사
3. 순조 즉위 초의 정치 활동
4. 학문적 성향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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