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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상현 (한양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정치학회 한국정치학회보 한국정치학회보 제45집 제5호
발행연도
2011.12
수록면
193 - 220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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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의 미중관계개선은 전후 아시아질서를 규정해 온 미중냉전구도를 타파하고 데탕트의 시작을 알렸음은 물론 동아시아 지역협력체의 존폐에도 큰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본 논문은 이러한 1970년대 초반 한국의 동아시아외교를 ASPAC을 사례로 들어 분석하고 있다.
ASPAC은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지역정세속에서 아시아 자유진영국가들의 결속강화를 위해 한국정부의 주도로 만들어진 지역협의체였다. ASPAC은 1966년 서울에서의 제1차 각료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1972년 서울회의까지 7번의 각료회의를 개최하였으며, 1972년 서울회의를 마지막으로 서서히 그 활동을 정지하게 된다. 본 논문은 ASPAC의 활동시기 중에서 1972년부터 1973년 사이의 2년간의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미중관계개선과 중일국교정상화를 시작으로 지역의 긴장완화가 이루어진 시기에 ASPAC이 왜 자연소멸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ASPAC해체위기에 맞서 한국정부는 어떠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ASPAC와해를 가져온 요인으로는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을 들 수 있다. ASPAC종식의 외부적 요인은 미중관계개선과 중일관계정상화로 인한 동아시아 냉전구도의 와해였다. ASPAC은 동아시아의 미중대결이라는 냉전대립구도에 기반한 지역협의체였지만, 미중관계개선으로 미중화해국면에 들어서게 되자 대중봉쇄라고 하는 그 존재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던 것이다. ASPAC 종식의 내부적 요인은 대만문제였다. 일부 참가국이 공산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거나 서두르는 상황에서 대만이 회원국으로 참가하는 ASPAC은 이들 국가들에 있어 불편한 존재로 인식되게 되었던 것이다. ASPAC해체위기에 직면하여 한국정부는 미국정부에 지원요청을 하고 직접 대만 설득공작에 나섬으로써 ASPAC의 와해를 막고자 했지만, 이러한 한국정부의 외교적 노력은 결국 미국정부의 부정적 반응과 대만정부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하고 만다.

목차

논문요약
Ⅰ. 서론
Ⅱ. 미중관계개선과 한국정부의 초기대응
Ⅲ. 서울각료회의의 개최와 한계
Ⅳ. 중일국교정상화의 충격
Ⅴ. 한국정부의 대응과 좌절
Ⅵ. 결론
〈참고문헌〉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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