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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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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고전번역원 민족문화 민족문화 제34집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273 - 306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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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이 무도하게 정권을 탈취하자 이에 대한 저항이 줄기차게 일어났고, 그에 따른 탄압 또한 무자비했다. 세조와 동복(同腹) 형제간인 금성대군이 순흥으로 이배되어 위리 안치된 것도 그 여파였다. 그런데 그를 감시 감독하는 위치에 있던 순홍부사가 단종의 입장을 동정하는 이보흠이었으니 두 사람 간에 義擧 모의가 태동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들은 병자년(1457) 3월경 단종이 가까운 영월에 이배된 것을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단종을 옹립하여 영남을 배경으로 중앙의 세조 세력과 대결, 이를 타도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인 둣 보이지만 세조 측의 치밀한 계획적인 함정이었으니 한 곳에 모아 놓고 구실을 만들어 一網打盡하려고 한 술책을 꾸민 것이다.
때문에 결정적 증거인 의거 檄文이 세조 측 수중에 들어가자마자 금성대군은 체포되고 순흥부는 도륙되었다. 실록에는 그 날짜가 병자년(1457) 6월 27일로 되어 있는데, 告變과 체포 날짜가 뒤섞여 6월 27일이란 날짜가 등장했지만, 딱 이날 하루로 못을 박기에는 여러 가지 석 연치 못한 정황이 있다. 어쨌든 6월 말일 경에 고변이 있었고, 관련자가 체포되고 죄인들을 심문하는 한 달여 동안 순흥에는 피비린내 나는 참극이 벌어졌다. 그리고 8월 2일, 조정에서는 순흥부를 反逆鄕으로 낙인찍어 혁파하였다. 따라서 公?와 민가는 파괴되고 지역은 주변 고을에 편입되었으며, 吏屬은 죄인으로 지목되어 모두 강원도의 殘驛에 付處되었다. 이 의거 과정에서 3백여 명에 달하는 죄 없는 生靈들이 도륙되고 몇몇 가문은 멸문의 화를 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구체적 인 실상을 알려 주는 기록은 거의 남지 않았다.
이후 2백 년이 넘도록 순흥부는 복구되지 못하고 희생된 원혼들은 원통함을 위로받을 길이 없었다. 이 문제는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쉽사리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禁忌가 다소 해이해진 반면, 단종 복권 논의가 명분을 얻어 가자 숙종 대에 들어와서 혁파된 지 225년 만에 순홍도호부가 복설되고 이를 시작으로 단종의 복위와 殉節 인물들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I. 緖言
II. 관련 史料의 검토
III. 금성대군 義擧謨議의 全貌
IV. 단종의 寧越 流配 시기
V. 結語
Abstract

참고문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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