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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명화 (독립기념관)
저널정보
한국인물사연구회 한국인물사연구 한국인물사연구 제11호
발행연도
2009.3
수록면
291 - 331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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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거가 일어나게 되는 직접적 배경에는 大東共報社와 그 주필이었던 李剛의 활약이 있었다. 이강과 안중근의 관계는 공공연하게 알려졌으나 이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 안중근의거는 한국독립운동 사상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계획단계로부터 실행과정, 그리고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애초부터 철저하게 짜여진시나리오대로 진행되었다. 이 같은 안중근 의거가 계획되고 실행되기까지 이강은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강의 조국 광복에 대한 강렬한 신념이 있었기에 안중근 의거는 준비되었고 이강과 더불어 의거를 지원했던 공립협회ㆍ국민회 원동지회원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아마도 의거의 실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안중근의사는 형사 및 재판 訊問 과정에서 일제의 집요한 신문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伊藤博文 처단이 자신의 단독 결행임을 주장했으며 의거에 참여한 이들에게 후환을 끼치거나 혐의가 미치지 않도록 치밀하게 진술함으로써 이강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일제의 검거망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올해로 의거 100주년이 되었으나 자세한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편 이강은 안중근의사 사후에 재러한인사회에서 안중근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유족들을 보호하고 책임지고자 했으며 안중근의사의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을 국외 한인 동포사회로 확산시켜 그의 의로운 의거가 우리 민족에게 잊혀지지 않고 살아있는 민족정신으로 자리할 수 있도록 전력하였다. 1923년에 러시아를 떠난 이후에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약했으며 해방이 되기까지 한 순간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강은 임시정부의 업무를 수행하느라 해방된 지 이듬해인 1946년 8월에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국내에서 한국독립당 고문을 맡고 교육 사업에 투신했으며 흥사단과 안창호기념사업에 종사하였다. 정부는 1962년 3월 1일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목차

【국문요약】
Ⅰ. 머리말
Ⅱ. 이강의 출생과 미국이민
Ⅲ. 공립협회의 결성과 원동위원으로 파견
Ⅳ. 『大東共報』 창간과 안중근과의 만남
Ⅴ. 안중근 의거와 국민회 시베리아총회
Ⅵ. 안중근의거 이후 이강의 독립운동
Ⅶ.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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