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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병곤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39輯
발행연도
2011.3
수록면
73 - 95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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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는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창건하고 백제의 침략을 방비하여 6개성을 신축했던 광개토왕의 재위 초반 행적을 평양 천도의 예비 작업으로서 이해한다. 그리고 뒤를 이어 즉위한 장수왕이 평양 천도를 실행하고 이를 기반으로 남진 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광개토왕은 재위 후기에 이르러서 국내성을 증수하고, 관심을 국동으로 옮겨 7개성을 신축한 후 평양민을 이주시켜 동부여를 정복했다. 이를 보면 광개토왕대부터 평양 천도를 계획했다고 보기 어렵다. 당시 광개토왕은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실현하기 위해 위무사해를 도모하며, 한반도 남부의 백제와 왜 등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일시 평양을 중시하였을 뿐, 후반기에는 오히려 요동과 국동 지역에 국정 운영의 비중을 두었다.
결국 평양 천도가 광개토왕대부터 준비되었다고 하는 통설을 재고해야 한다면 새로운 천도의 기획 시점을 확보해야한다. 이에 필자는 서상 기사 3건이 연속 기록된 장수왕 2년(414)을 천도의 기획 시점으로 보고자 한다. 『삼국사기』의 서상기사는 해당 시기의 정치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왕경에는 2건의 구징(이조 군집, 오척 대설)이 있었던 반면, 새로운 천도지가 될 평양 일대(사천지원)에는 흰노루가 포획되는 서상이 있었다. 더구나 흰노루의 포획자는 장수왕이었다. 왕경에는 구징이 거듭 나타나는 와중에 장수왕이 평양 일대에서 흰노루를 포획했다는 것은 왕이 천도를 주도했고, 이를 천도의 계기로 삼겠다는 왕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백제 온조왕이 왕도에서 연이은 3건의 구징을 계기로 이듬해 천도를 단행한 양상과 유사하다.
일반적으로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남진 정책의 실행이나 북위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천도 이후 48년이 지난 이후에야 본격적인 남진이 이루어진 점과 천도 당시 북위는 소국에 불과했던 점에서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러한 외적 요인보다는 광개토왕대 영토 확장이 있었고, 뒤를 이은 장수왕대 영속적인 지배력의 확보와 정치적 안정이라는 내적인 요인으로 천도가 비롯되었다고 판단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廣開土王의 威武四海와 平壤
Ⅲ. 長壽王의 平壤遷都에 따른 南進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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