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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Kim Paekchol (전북대학교)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Vol.16 No.1
발행연도
2011.2
수록면
51 - 80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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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이래 조선은 양란이후 후유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붕당정치기 다양한 각도에서 更張案의 모색이 이루어져 왔으나, 어느 붕당도 경장을 완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는 못하였다. 18세기가 되면 강력한 구심점을 바탕으로 大更張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체제에 대한 청사진이 탕평정치로 나타나게 되었다.
영조초반에는 黨習이 극에 달하여 국왕조차도 붕당에서 자유롭지 못한 정국이 연출되었다. 이에 국왕은 양자택일의 구도를 해소하기 위해서 제3의 길을 제창하고 이를 군주주도의 탕평으로 제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왕은 堯舜이 되었고 그 권위를 바탕으로 국정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국왕’의 정치명분을 획득하자, 각 붕당을 국가제도의 경장사업에 참여시켜 상호경쟁 속에서 ‘국가’의 사업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속대전』을 비롯한 국가의 문물제도가 정비되었다. ‘국가’ 제도의 정비사업이 일정한 궤도에 오르자 이제는 보다 근본적인 稅制의 개편에 몰두하게 되었다. ‘백성’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계발이 이루어지면서 균역법으로 최종 귀결되었다.
영조는 사족과 양민들을 아우르는 모든 백성들의 군주가 되고 싶었기에 기득권층에게는 양보와 희생을 요구하여 전제군주로서 군림하였으며, 약자였던 양민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운 요순군주로서 다가가고자 했다. 이에 18세기 탕평군주는 전제군주와 요순의 자애로운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지니는 국왕으로서 자리매깁하게 되었다.

목차

Introduction
The onset of the T‘angp‘y?ng Policy: Securing the legitimacy of the king
Actualization of the T‘angp‘y?ng (Impartiality) Policy: Reorganization of the national system
Result of T‘angp‘y?ng Policy: Reform of the public taxation system
Evaluation of theT‘angp‘y?ng Policy: Actualization of the Yao·Shun era? Or advent of a Despotic monarch?
Conclusion
〈Abstract〉
〈국문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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