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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노중국 (계명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57
발행연도
2010.3
수록면
5 - 44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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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후반 이후 低濕地에 대한 발굴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많은 목간들이 발굴되었다. 또 최근에는 미륵사서탑 사리봉안기나 포항중성리비와 같은 새로운 금석문도 출토되었다. 새로운 자료들의 출현은 한국고대사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금석문이 보여주는 중요한 내용 몇 가지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해석해 본 것이다.
금석문은 금속이나 돌에 새긴 글자를 말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 학계에서는 金文과 石文 이외에 토기나 기와 및 전돌에 새긴 글자, 나무 조각에 쓴 木簡, 고분의 벽과 漆器에 쓰인 글씨 등도 금석문의 개념 속에 모두 포괄시키고 있다. 이는 금석문의 본래의 의미를 모호하게 한다. 필자는 금속이나 돌에 새긴 것만 금석문으로, 나무에 쓴 것은 목간으로, 붓으로 쓴 것은 墨書로 부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우리나라에서 논농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삼국시대에 와서 더욱 확대되었다. 백제와 신라는 논에 대한 표기를 달리 하였다. 백제는 水田로 표기한 반면 신라는 畓으로 하였다. 답자는 신라가 만들어낸 글자이다. 이 답자는 통일신라 이후 논을 나타내는 글자로 보편화되었다.
영천청제비는 저수지 축조와 수리에 관련한 내용을 보여준다. 삼국이 저수지를 표기하는 방법은 달랐다. 7세기 이전 신라는 塢로, 고구려는 吐로, 백제는 池로 표기하였다. 7세기 이후에는 堤(?)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한편 논에 물을 대는 시설은 洑라 하였고, 저수지의 물을 밖으로 빼내는 시설을 배굴리하였다. 이 배굴리는 고려시대 이후에는 水桶 또는 木桶으로 표기되었다.
영일냉수리신라비에는 ‘此七王等’이 나온다. 이를 ‘7명의 왕들’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等’은 복수의 의미로, ‘왕’은 ‘님’으로 읽어야 한다고 본다. 이렇게 읽으면 ‘此七王等’은 ‘이 일곱님들’로 해석되어 이들은 왕이 아닌 것이다.
미륵사지西塔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의 왕비는 사탁적덕의 딸로 나온다. 이를 근거로 하여 『삼국유사』에 나오는 선화공주를 허구의 존재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는 2명 이상의 왕비가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였다. 필자는 선화공주가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선화공주와 사타씨 왕후 모두를 왕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561년에 만들어진 창녕비에는 大一伐干이 나온다. 대일벌간은 특별한 공로를 세운 유력한 귀족들에게 주어지는 非常의 관등이다. 이 비상위가 만들어진 시기는 법흥왕이 대왕으로 격상된 535년 이후 진흥왕이 활발하게 정복활동을 한 551년 사이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울진봉평신라비〉에는 지방세력에게 준 관등인 外位의 하나로 下干支가 나온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봉평비가 만들어진 524년 당시에는 하간지가 가장 높은 외위라는 전제 위에서 신라의 外位制는 524년 이후 561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완성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524년 당시 울진 지역은 신라 사회에서 차지하는 정치적 비중이 낮았다. 따라서 울진지역보다 위상이 높은 지역의 지방 세력들은 하간지보다 높은 외위를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필자는 봉평비가 만들어진 시기에 외위제가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5~6세기에 신라와 고구려는 자국의 왕을 대왕이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백제의 경우 2009년에 발굴된 사리봉안기에 무왕을 대왕으로 표기한 내용이 나왔다. 이로써 삼국이 모두 자국의 왕을 대왕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왕의 칭호가 대왕으로의 격상됨에 따라 고구려와 신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또 신라와 백제는 대왕 아래에 제후왕을 설치하였다. 신라의 경우 울주 천전리서석 追銘에 갈문왕을 왕으로 표기한 것과 七支刀 명문에 백제가 왜왕을 侯王으로 표현한 것이 그 사례가 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금석문과 목간 자료의 수집과 정리
Ⅲ. 해야 할 과제
Ⅳ. 몇 가지 주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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