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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연구소 미술사논단 美術史論壇 第21號
발행연도
2005.12
수록면
111 - 135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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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미술사 분야 학술조사에 참가하여 고려미술관에서 특이한 모습을 한 1軀의 彫像을 보았다. 그 조상에는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어, 여기에 그 조상에 관한 견해를 소개하고 아울러 그 특이성의 意義에 대해서 개인적 소견을 피력해 보고자 한다.
이 조상은 金鋼造의 等身像으로 頭部에 관을 쓴 것 외에는 의상과 장식품 등을 전혀 표현하지 않은 裡形이며, 倚坐한 모습으로 크기는 100.8㎝이다. 나체의 빈약함은 조금도 없이, 당당하게 주위를 압도하는 위풍을 느끼게 하고 있다. 頭頂에서 발끝에 이르기까지 양질의 銅으로 一鑄하였는데, 곳곳에 남아 있는 鍍金 흔적으로 미루어 보아 당초에는 전신에 도금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상 표면은 약간 거칠어진 부분이 있지만, 원래의 像容 모습을 손상시키는 부분은 전혀 없다.
이 조상은 현지 연구자에 의하면 1990년부터 시작된, 개성시 海仙里에 위치한 고려 태조 왕건의 陵墓인 顯陵의 발굴 조사와 정비 작업 때 玄室에서 正北으로 5m 떨어진 능묘 바깥의 지하 1.5-2.0m 지점의 화강암 石板 아래에서 발굴되었으며 발굴 당시 이 상은 體部에 얇은 絹布과 金箔, 12개의 玉帶 장식품 등을 부착한 채 출토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왕실 초상 관계 자료’에 의하면 태조의 影幀 등을 陵 옆에 묻었다는 기록과 고려 태조의 鑄像의 기록도 있어, 이 상은 奉恩寺 太祖 眞殿에 봉안되어 있던 太祖像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생각된다.
조선시대에 이단시되어 매납 폐기된 고려 태조 왕건상이라고 생각되는 이 〈銅造裸形男子倚像〉은 고려시대의 회화나 조각, 혹은 10-13세기의 동아시아의 왕공 초상에서 볼 수 있는 공통성과 이질성이 함께 나타나고 있어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존재이다. 동아시아에서 왕공 초상 彫刻像을 금속으로 제작한 예는 중국의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왕건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나형 표현이 어떻게 가능하였는지 대해서는 명확하게 해석되지 않는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고려불화의 특색 중 하나인 옷을 통해서 속이 비쳐보이게 하는 표현법과 상통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표현법은 동아시아에서는 西夏의 12-13세기의 불화에서 약간 사용되었지만, 고려 불화만큼 현저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중국이나 한국의 왕공 초상 조각에서 着裝한 예가 달리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聖德太子像과 같이 착장한 작품이 몇 점 있다. 일본의 착장상 작품과 비교해 보면, 고려 태조 왕건상은 벌거벗은 전신을 세심하게 표현한 특이한 상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고려불화처럼 속이 옷을 통해서 비치도록 하는 표현법과 같이 아름답게 조형하고 도금한 육체가 얇은 옷을 통해서 비쳐 보이도록 조각 작품에 응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초상조각에 금색을 칠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 금색 표현과 의상 형식 두 가지 점을 모두 구비한 상은 동아시아에서는 볼 수 없다. 이를 근거로 하여 볼 때 태조 왕건상은 衆生 救濟의 부처로서의 彌勒佛 표현을 의도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왕건은 젊은 시절부터 미륵불을 자칭한 궁예의 미륵신앙교단이나 통일신라의 성립에 공헌한 신라 청년 귀족인 무장집단 화랑도들의 미륵신앙의 영향을 받아서 미륵불을 동경하려는 의식이 강하였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이 왕건상의 금색 표현과 의좌 형식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왕건상은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표현한 王法의 상징으로서 可視化, 具體化라는 세속적인 표현에서 佛法信仰의 대상이 되는 生身化, 禮拜化라는 성스러운 表象으로 전환을 시도한 조각의 一例일 것이다.
왕건이 고려왕조를 세울 때 불교에 의한 鎭護國家思想을 바탕으로 정책 결정을 하고, 이후의 고려왕조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하였듯이 이 왕건상은 이후의 고려 미술, 특히 조각 작품이나 회화 작품의 표현법의 방향을 명확하게 시사한 존재라는 점에서 아주 흥미롭다. 이 상의 제작 시기는 태조의 願堂으로서 大奉恩寺를 창건하고 태조의 眞影을 봉안한 전후일 것으로 생각된다.

목차

Ⅰ. 머리말
Ⅱ. 像容과 素材
Ⅲ. 裸形男子倚像의 세부 관찰
Ⅳ. 고려시대의 왕실 초상의 행방
Ⅴ. 고려시대의 미술 작품에서 보이는 裸形 표현과 着?像
Ⅵ. 태조 왕건의 미륵 憧憬: 금색 표현과 倚像 형식에 관하여
Ⅶ.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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