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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56
발행연도
2009.12
수록면
367 - 397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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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中國 陝西省 西安市에 있는 西安碑林博物館에서 고구려 유민의 묘지석 한 점을 새로이 확인했다. 묘지석에는 墓主의 官職과 이름, 출신지와 唐으로 들어오게 된 까닭과 당에서의 활동 등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묘주의 죽음과 묻힌 곳 등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묘지문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묘주는 고구려 출신의 高?苗였다. 그는 당에서 궁정을 수비하고 황제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左領軍 員外將軍을 지냈으며, 武官임에도 불구하고 文章과 言辯에도 재주가 있었다. 673년 11월 11일에 당의 수도 長安城에서 갑자기 죽었고, 장안성의 남쪽에 묻혔다.
『三國史記』의 「高句麗本紀」의 기록과 묘지문을 비교한 결과 묘주인 高?苗는 바로 668년 9월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수비하던 小將 饒苗와 동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군과 내통하여 평양성의 성문을 열어주었고, 그 때문에 평양성이 함락되었고, 고구려는 멸망했다. 高?苗는 고구려의 멸망에 결정적 역할을 한 배신자였다. 하지만 당의 입장에서는 宿賊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공신이었다. 이 공로로 668년 12월 당에 들어가 從3品 左領軍 員外將軍이라는 高位 武官職을 除授받았고 황제를 近侍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묘지문에는 우회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젊은 나이에 고구려 유민에게 암살당하여 일생을 마감하였다.
당은 이민족 출신으로 투항해 온 인물들을 상당히 우대하였다는 사실을 高?苗墓誌石을 통해서 재차 확인할 수 있다. 寶藏王과 男生이 당에서 받았던 관직이 正3品官이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高?苗가 從3品官을 받았다는 것은 당의 異民族에 대한 支配政策의 一端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고구려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背信者인 武將 高?苗의 墓誌石은 亡國 高句麗歷史의 아픔과 당으로 진출한 고구려인의 片鱗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墓誌의 現況과 判讀
Ⅲ. 高鐃苗의 出自
Ⅳ. 高鐃苗의 入唐 背景과 活動
Ⅴ. 맺음말
참고문헌
中文摘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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