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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余昊奎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53
발행연도
2009.3
수록면
159 - 200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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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高句麗 대외정책과 中國系 亡命人의 정체성 인식을 고려하면서 낙랑ㆍ대방지역 경영을 고찰한 것이다. 고구려는 4세기 초반 요동진출을 최종목표로 삼아 대외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313~314년 樂浪·帶方郡을 점령한 다음에도 최소한의 국력만 투입해 이 지역을 경영했다. 그러다가 333~336년 前燕에 내분이 일어나자, 요동진출을 위한 토대를 다지는 한편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거나 지배력을 강화했다. 이때 낙랑ㆍ대방지역에도 대동강 북안에 平壤城을 축조해 지배거점을 마련하고 지배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342년 전연에게 도성까지 함락당하는 위기를 맞은 이후, 전연의 침공이 예상되는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낙랑ㆍ대방지역에는 중국계 망명인을 대거 이주시켜 재지질서를 재편하면서 통치력을 강화했다. 안악3호분의 피장자인 ?壽도 이때 이주되어 고구려의 통제 아래 세력기반을 마련했다. 다만 동수는 저승에서 만큼은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고 싶어 했다. 그는 중국왕조의 질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後漢-西晉代를 기준으로 출신지를 표기하고 관작을 자칭하며 이상적인 사후세계를 꿈꾸었다.
350년대 이후 전연이 북중국까지 진출하자, 고구려는 전연과 우호관계를 맺은 다음 남진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고구려는 전진기지인 낙랑ㆍ대방지역의 지배체제를 더욱 확고히 다져 나갔다. 이때 고구려는 재지세력이나 중국계 망명인에게 관등을 수여하며 준관인층으로 편입했다. 덕흥리벽화고분의 피장자인 鎭도 그 중 한 명이다. 다만 鎭도 西晉代를 기준으로 이상적인 사후 세계를 꿈꾸었다. 鎭의 관작도 망명 이전에 역임한 하위직과 고구려로부터 수여받은 小大兄을 제외하면 모두 이상적인 사후세계를 꿈꾸기 위해 자칭한 것에 불과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高句麗의 樂浪ㆍ帶方郡 점령과 平壤城 축조
Ⅲ. 中國系 亡命人의 이주를 통한 樂浪ㆍ帶方지역 경영
Ⅳ. 樂浪ㆍ帶方지역 재지세력과 中國系 亡命人에 대한 官等 수여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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