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42·243號
발행연도
2004.9
수록면
291 - 318 (28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一濠 南啓宇는 蝴蝶圖를 잘 그린 문인화가로 남종화가 지배적이었던 19세기 화단에서 정밀하고 장식적인 群蝶 형태의 호접도를 그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로 이어지는 호접도 유행을 주도한 화가로 평가된다.
남계우의 본관은 宜寧이며, 숙종대 영의정을 지냈으며 소론의 영수였던 南九萬의 5대손으로 조선후기 대표적인 소론 집안의 지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평생을 호접도 제작에 몰두하면서 56세 (1866년)에 처음으로 종 9품의 監役 벼슬을 음직으로 받았다. 이후 71세(1882년)에 통정대부의 품계를, 1883년에는 가선대부의 품계를 받고 돈녕부 도정을 지내다 80수인 1890년에 돌아갔다. 현재 까지 그의 沒年은 1888년으로 알려져 왔으나 『宜寧南氏杆城公波譜』를 통해 그가 1890년 1월 11일에 사망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계우는 호접도 외에도 전각을 즐겨하였다. 후손댁에 소장되어 있는 『一濠堂圖書記』는 그가 직접 각한 100여 개의 전각을 모은 인보로 현존하는 작품들에 찍혀 있는 인장들과의 비교를 통해 작품의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다.
남종화가 화단의 주류였던 19세기에 소론의 명문가 자손으로 문인화가였던 그가 섬세한 공필의 호접도를 그리게 된 배경은 영조대 이후 정계에서 물러난 소론들과 근기남인들의 학풍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와 근기남인과 소론들에 의해 박물학에 관한 여러가지 저서들이 편찬되었으며 한 사물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 성과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남인 실학자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1970-1816)이 흑산도 유배 시절에 근해의 수산생물을 채집하고 관찰하여 분류한 『玆山漁譜』가 대표적이다. 남계우는 정약용의 외손자인 舫山 尹廷琦(1814-1879)와 교류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지신이 좋아하는 나비를 채집 관찰을 통해 체계적으로 연구하였으며 중국 고전 문헌과 박물학에 관한 책에서 나비의 생성 및 명칭의 유래 등에 대한 기록을 찾아 시기별로 정리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남계우의 작품은 대략 60여 점이며 화목별로 분류해 보면 산수화가 2점, 화조화가 2점이며 나머지는 호접도이다. 대부분의 호접도에 간기가 없어 정확한 시기를 기준으로 하는 시기구분은 불가능하나 제발, 인장, 나비의 묘사 변화를 통해 크게 3가지 시기로 나누어 화풍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먼저 1기의 제작된 작품들에는 '一濠寫’ 라고 관서하였으며 인장을 찍지 않았다. 한 화면에 대략 2-6마리 정도의 나비를 그렸으며 19세기 이전부터 전통적으로 많이 그려지던 ??圖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기는 남계우만의 호접도 형식을 형성한 시기로 ‘一濠’, ‘一濠散人’ 이라는 관서를 쓰고 한 작품에 적게는 2개에서 많게는 6개에 이르는 인장을 사용하였다. 특히 세로 길이가 1m가 넘는 축 형태의 작품들을 많이 제작하면서 화면을 3단으로 나누어 상단에는 題跋, 중단에는 群蝶, 하단에는 배경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화면구성은 이후 19세기에 유행한 호접도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형식으로 남계우에 의해 정립되어 이후 많은 호접도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 것이다. 3기에는 ‘一濠老’ 라고 관서하였으며 한 작품에 6개 이상의 인장을 찍었다. 나비의 묘사가 사실적인 표현을 넘어 생동감 있게 그려졌으며 등장하는 배경의 화훼가 다양해지면서 다양한 화면 구성이 나타난다.
남계우는 이후 호접도를 그린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家傳되어 그의 아들 周元이 그린 호접도가 전하고 있으며, 李敎翼(1807-?), 高鎭升(1822-?), 宋修勉(1847-1916), 徐丙建(1850-?), 李絅承(1862-1927)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말기 호접도 유행을 이끌어나간 선구적인 화가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의 호접도는 남계우가 이룩한 축 형태의 군접도 형식을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으나 남계우의 나비 묘사가 사실적인 표현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후대에 와서는 장식적이면서 화려한 묘사가 특징적이다.
남계우는 실물을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사생한 과학적인 연구방법으로 호접도를 제작하였다. 또한 군접형태의 호접도라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호접도 형식을 만들어 이후 호접도를 그린 많은 화가들에게 그의 호접도가 전범이 되어 영향을 줌으로써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초충도 범위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유행한 나비그림의 유행을 이끌어간 문인화가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 화단의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노론들 중심의 주류 회화양상과는 달리 영조 이후 정계에서 물러난 소론과 남인들이 주축이 된 또 다른 회화발달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에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南啓宇의 家系 및 生涯
Ⅲ. 南啓宇 蝴蝶圖 成立 背景
Ⅳ. 南啓宇 蝴蝶圖의 시기별 작품 분석
Ⅴ. 南啓宇 蝴蝶圖의 영향
Ⅵ. 맺음말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09-609-014726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