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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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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27號
발행연도
2007.6
수록면
731 - 758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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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평택지역 토성 중 성벽이 조사 된 琵琶山城, 德睦里城, 龍城里城, 武城山城, 農城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 지역 토성은 축조방식에서 기저부에 점질토를 조성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차이점은 중심토루를 조성하기 위한 기단석축의 유무와 판축공정 및 구성재료가 토성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축조방식의 차이는 성곽의 축조시대와 주변지형과 관련이 있었다. 기단석축은 비파산성과 덕목리성에서 확인되었다. 이들 성은 판축으로 중심토루를 구성하였다. 비파산성과 덕목리성은 축조방식과 출토유물 등을 통해 보면 통일신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심토루가 판축이 아닌 경우는 용성리성, 농성, 무성산성 등이었다. 이들 성들은 해자 혹은 내측 구를 파며 나온 토사로 성벽을 축조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중 무성산성은 산 정상부에 축조되었고, 점토보다는 자갈과 석재를 혼합하여 중심토루를 조성하였다.
이 지역 토성이 축조된 이후에 사용된 상황은 다음과 같다. 비파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어 고려 광종 대에는 크게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성현의 치소로써 자미산성에서 그 역할을 옮겨 온 것으로 보인다. 비파산성의 기능은 통일신라시대에 자미산성, 무성산성과 더불어 안성천 하구변의 해안방어와 해로교통망 확보에 있었다. 덕목리성은 통일신라시기 이 지역에 인구가 집중하면서 새로운 촌락과 행적적인 거점을 위해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동성과 서성으로 토성이 붙어있는 특이한 구조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용성리성은 고려후기에 아산만 일대로 진출한 왜구들로 부터 비파산성을 방비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후기에는 무성과 자미산성, 용성리성은 남북으로 연계하는 구조로 비파산성을 방비하고 있다. 농성은 고려후기 혹은 조선시대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구가 습격해 올 때에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농성의 구조가 인근주민이 장기간 立保하여 전투를 치르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평택지역 토성 조사 성과
Ⅲ. 평택지역 토성의 특징
Ⅳ. 맺는말
【日文要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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