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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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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47
발행연도
2007.9
수록면
197 - 221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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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60년대 초 북한의 삼국통일과 발해사에 대한 인식과 그 배경을 검토함으로써 남북국시대론이 북한의 국사체계의 정립 과정에서 고안된 것이 었음을 살펴보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그 배경으로서 신채호의 사론 및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주목하였다.
1950년대 중반 북한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고 그 민족형성사적 의의를 중시하였다. 동시에 고구려의 후계국으로서의 발해의 역사적 의의도 인정하였다. 반면 1960년대 초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은 부정되고, 그것은 신라의 국토 남부 통합과 고구려 옛 땅에서의 발해의 성립으로 정리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였다는 점과 발해가 당을 비롯한 외세와 투쟁 끝에 건국하였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과 통하는 면이 있다고 여겼다.
1960년대 초 북한의 고대사 인식은 한말 신채호의 주장과 유사하였다. 그는 1908년 발표한 ??독사신론??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고, 발해·신라의 ‘양국시대’를 설정한 바 있었다. 그는 흔히 통일의 영웅으로 칭송되었던 김춘추를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국가를 멸한 자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반면 고구려의 후계자로서 외세와의 투쟁 끝에 건국한 발해의 역사적 의의를 높게 평가하였던 것이다.
일제시기 유물사관에 입각한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신채호를 비롯한 민족사학 계열의 역사가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해방 이후 그들 중 일부는 북한 역사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950년대 고중세사와 관련한 북한 역사학계 최대의 관심사는 고대 노예제사회와 중세 봉건제사회의 설정 문제였다. 그러므로 신채호의 역사학이 주목받기는 어려웠다고 보았다.
북한에서는 1955년 말부터 ‘주체’의 확립 문제가 공식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처음 그것은 사상에서의 주체 확립의 필요성에 대한 것이었는데, 1962년 말에는 주체사상으로 정리되었다. 이에 따라 북한의 역사학계도 주체적 역사관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사대주의적 역사관을 강력히 비판하였던 신채호가 주목되었던 것으로 생각하였다.
1960년대 초 북한의 고대사인식은 주체사상을 배경으로 하면서 사학사적으로는 한말 민족주의 사학자인 신채호의 역사인식을 계승하면서 성립하였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신라의 ‘삼국통일’과 발해사에 대한 인식과 신채호
Ⅲ. 신채호의 ‘復權’과 주체사상
Ⅳ.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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