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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홍은혜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김병준
발행연도
2023
저작권
서울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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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3)

초록·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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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頡剛은 20세기 중국의 疑古學派를 대표하는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힐강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세간에서도 그리고 기존 연구들에서도 종종 많은 오해가 있어 왔다. 지금까지 고힐강에 대한 연구는 중국고대사 분야에 종사했던 역사학자 고힐강의 학문 연구 그 자체만을 대상으로 삼거나, 아니면 현대사적 시각에서 5·4시기에 등장하여 활동한 지식인의 하나로서 고힐강의 활동 내용을 대상으로 다룬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고힐강을 ‘純粹 학자’로 바라보는 쪽에서는 그를 의고학파의 거두라고 강조하면서 또한 동시에 ‘賣國奴’라고 그를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같이 ‘순수 학자’라는 평가와는 또 정반대로 고힐강의 현실 참여적인 모습을 두고서 그를 ‘민족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생의 많은 부분을 고대사 연구에 할애했던 學人으로서의 고힐강의 모습과 ‘國亡’의 시기를 살았던 지식인으로서 현실 참여에 대한 의지를 지녔던 고힐강의 모습, 양자 사이는 과연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고힐강에게 있어 양자가 나타나는 모습이 단절적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많았던 기존 연구와는 다르게, 고힐강의 실제 古史 연구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중심으로 고힐강의 현실 참여와 그의 古史 연구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고힐강은 일반적으로 ‘순수 학자’로서의 면모로 그동안 많이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힐강이 현실과 동떨어진 채 학문에만 몰두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고힐강은 1920년대부터 1930~4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지식인으로서 현실 정치에 대한 참여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민족의 위기가 심화되는 시기에는 ‘救國’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구국’이란 정치적 활동이 아닌 학술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그가 ‘구국’이란 말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정치적 인물로 곧바로 등치되어 이해된 바 있다. 하지만 실제로 <顧頡剛日記> 등을 통해 그 자신의 발언을 살펴본 결과, 고힐강에게 있어 ‘구국’이란 다름 아닌 학술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힐강의 ‘구국’ 활동이 곧 그의 학술 활동이었다면, 어떻게 고힐강의 학문 연구가 ‘구국’을 위한 활동으로 직접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 고힐강은 理性의 힘으로써, 즉 啓蒙을 수단으로 삼아 非理性이 지배하던 당시 중국을 救濟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고힐강에게 있어 이성의 추구를 통한 계몽의 확장이 곧 ‘구국’이었다.
이어서 본고에서는 1920년대와 1930~40년대 고힐강의 면모를 가르는 주요 변곡점이 되는 사례로 자주 들어지는 <禹貢> 잡지를 첫 번째 사례로 삼아 실제 그 내용을 분석해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힐강의 현실 참여적인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사례로 지적된 바 있는 <禹貢> 잡지의 편집 때문에, 고힐강은 그간 ‘민족주의자’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처음에 ‘구국’의 필요성을 느끼고 <禹貢>을 창간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증적이고 세밀한 고증 위주의 경향은 <禹貢> 잡지 안에서도 그대로 구현되었다. 한편 고힐강이 편찬한 <現代初中敎科書本國史>의 사례 역시도 고힐강이 학술 서적이 아닌 대중 서적을 펴냈다는 점에서 그를 ‘민족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주요 근거 중 하나로 들어져 왔다. 하지만 고힐강은 시종일관 과거에 중국이 하나가 아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그가 살던 당시의 중국과 과거 사실 양자 간에는 철저히 구분 지어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학문적 신념은 결국 三皇五帝를 중국의 ‘傳說’ 시대로 규정하는 기존과는 상이한 교과서 서술로 이어졌고, 삼황오제를 민족 단결의 구호로 삼으려는 당시 南京 국민정부의 입장과 충돌함에 따라서 그가 편찬한 교과서는 전면 출판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이 밖에도 고힐강에 버금갈 정도의 ‘순수 학자’에 속하는 傅斯年이 일본의 침략이라는 민족의 위기 앞에서 결국 정치에 영합했던 것과는 달리, 고힐강은 중국 민족의 同一起源說을 부정하고 역사상 중국 강역의 유동성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끝까지 유지했다. 이처럼 고힐강은 단순히 ‘애국주의적’ 또는 ‘민족주의적’인 인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정확한 사실의 기초 위에 서는 것이야말로 ‘구국’의 올바른 방법이라고 믿었다.
다음으로는 ‘순수 학자’ 고힐강의 모습을 무엇보다 잘 드러내 주는 <尙書> 연구를 두 번째 사례로 삼아 분석해 보고자 하였다. <尙書>는 1920년대부터 고힐강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가 지속적으로 천착했던 연구로서, 고힐강이 중국 고대 경전이 갖고 있던 권위를 타파하고 上古 시대의 眞相을 드러내기 위해 택했던 중요한 사료로서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고힐강과 그의 연구에 대한 비판은 첫 번째 비판인 1926년 그가 <古史辨>을 편찬했을 당시뿐 아니라, 1950년대 胡適 비판의 시기, 그리고 1990년대 이후 ‘信古派’에 의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 차례나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이 세 차례의 고힐강 비판의 시기는 저마다 달랐지만, 고힐강을 ‘반민족적’이라고 비판했다는 점에서는 셋 다 모두 공통적이었다. 그러나 고힐강에 대한 비판과 오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信古’파에 의해 ‘疑古’파라는 오해 또한 근래 들어서 받고 있다.
구체적으로 ‘의고’와 ‘신고’ 양자가 각각 <尙書>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본고에서는 西周 시기부터 시작되는 역사 기록이 담긴 <尙書·周書>篇, 그중에서도 淸華簡에 들어 있는 <今文尙書>의 내용 중 일부와 동일한 「金縢」篇을 주요 사례로서 살펴보았다. 고힐강의 ‘의고’파와 李學勤의 ‘신고’파가 내린 결론은 모두 「金縢」篇이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기록이라는 것으로 동일하지만,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양자가 사용한 논거에는 일정한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신고’파의 주장에는 일부 문제가 존재하는데, 우선 ‘의고’파가 <僞孔傳> 등의 古書를 아예 폐기해버렸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출토 문헌인 간독 자료 역시 그 당시에는 또 하나의 ‘冊’이었다는 점에서 편찬과 유통 과정에서의 복잡성 문제가 존재한다.
결국 <尙書>에 대한 兩派의 해석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드러났듯이, ‘의고’와 ‘신고’파의 논쟁은 어떤 정치적인 의도와 목적하에서 이루어지는 ‘진영 논리’에 의해서 그 논점의 본질이 가려졌을 뿐, 양자가 사용한 방법상에는 사실상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고힐강의 <禹貢> 편집과 <尙書> 연구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고힐강의 古史 연구와 그의 ‘구국’ 양자 간은 서로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출토 문헌 범람으로 인해 ‘신고’파가 점점 우세해지는 현재 중국사학계의 경향 속에서 고힐강의 ‘의고’의 방법은 여전히 틀리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众所周知,顾颉刚是20世纪中国疑古学派的代表人物。然而,对于顾颉刚这个人物,无论是在一般的认识上,还是在现有研究中,都常有所误解。到目前为止,对顾颉刚的研究大多或只以从事中国古代史领域研究的历史学家顾颉刚的学术研究本身为对象,或从近现代史视角将顾颉刚作为五四运动时期活动的知识分子之一的活动内容当作对象。但是,将顾颉刚视为“纯粹学者”的一方在强调他是疑古学派的巨头的同时,也曾批判他是“卖国奴”。另一方面,与将其视作“纯粹学者”的评价截然相反,对于顾颉刚的现实参与,也有人批评他是“民族主义者”。但是将一生中大部分时间都用于古代史研究的顾颉刚和作为生活在“国亡”时期的知识分子致力于现实参与的顾颉刚,这两种形象真的可以被分开来看待吗? 基于这种问题意识,与既有研究中经常将两种形象视作断绝的两面不同,本文以顾颉刚古史研究的具体分析为中心,试图考察顾颉刚的现实参与及其古史研究之间的关联性。
顾颉刚作为“纯粹学者”的形象,一直以来广为人知。但是,顾颉刚也绝非脱离现实,而只埋头于学问的人。从20世纪20年代到30~40年代,顾颉刚作为知识分子一直抱有对参与现实的政治意识。特别是在民族危机加剧的时期,还为“救国”做出了具体的行动。但这里的“救国”并非指政治活动,而是指学术活动。到目前为止,仅以他使用“救国”一词为由,而径直将其视为政治人物。但实际上,通过考察《顾颉刚日记》等资料中顾颉刚发言的结果,发现对于顾颉刚来说,“救国”即是指学术活动。如果说顾颉刚的“救国”活动就是他的学术活动,那么顾颉刚的学术研究又是如何能与“救国”的活动直接连接起来的呢? 顾颉刚认为,以理性的力量,即启蒙为手段,可以救济受非理性支配的当时的中国。对于顾颉刚而言,通过对理性的追求扩大启蒙便是“救国”。
接着,在本文将常被视作区分20世纪20年代和30~40年代顾颉刚变化的主要转折点的《禹贡》杂志作为第一个事例,分析了其实际内容。因认为编辑《禹贡》杂志是最能体现顾颉刚现实参与的事例,顾颉刚受到了“民族主义者”的批评。但是,尽管是因感到“救国”的必要性而创刊了《禹贡》,但以实证与考证为主的倾向在《禹贡》杂志中也被原封不动地体现了出来。另外,顾颉刚编纂的《现代初中教科书本国史》也作为顾颉刚出版大众书籍而不是学术书籍的事例,成为批判他是“民族主义者”的主要依据之一。但是顾颉刚始终认为,重要的是明确知道过去并非一个中国的历史事实,且有必要对他生活的当时的中国与过去事实两者之间做彻底的区分。这种学术信念最终导致了将三皇五帝规定为中国的“传说”时代的,与以往的教科书不同的叙述。因这与当时想将三皇五帝作为民族团结口号的南京国民政府的立场发生冲突,导致顾颉刚编纂的教科书被全面禁止出版。此外,与顾颉刚同样被视作为“纯粹学者”的傅斯年在面临日本侵略这一民族危机时最终迎合政治不同,顾颉刚否定了中国民族的同一起源说,主张历史上中国疆域的流动性,坚持了自己的学术立场。像这样,我们很难将顾颉刚单纯的理解为“爱国主义”或“民族主义”的人物。他坚信唯有站在正确事实的基础上才是“救国”的正确方法。
其次,本文将能突出呈现顾颉刚“纯粹学者”形象的《尙书》研究作为第二个事例进行了分析。《尙书》是顾颉刚从1920年代到其晚年持续钻研的研究对象,是顾颉刚为打破中国古代经典的权威,展现上古时代的真相而选择的重要史料,因此其《尙书》研究具有重要意义。但是,对顾颉刚和他的研究的批评从其1926年编纂《古史辨》时的第一次批判,到1950年代批评胡適的时期,还有1990年代以后“信古派”的批评,共有三次。虽然这三次批判的时间各不相同,但在批评顾颉刚是“反民族主义者”这一点上却是一样的。然而对顾颉刚的批判和误解并未就此结束,最近还被“信古派”误解为“疑古派”。
为具体考察“疑古派”和“信古派”两者分别如何看待和解释《尙书》, 本文主要分析了包含从西周时期开始的历史记录的《尙书·周书》篇,特别是其中与淸华简《今文尙书》中部分内容相同的《金縢》篇。顾颉刚的“疑古派”和李学勤的“信古派”得出的结论虽在认为《金縢》篇是史实上值得信赖的记录这一点上相同,但两者使用的论据却不同。但“信古派”的主张却存在一些问题,首先认为“疑古派”直接否定了《伪孔传》等古书的主张并非事实,并且因当时作为出土文献的简牍资料也只是另一种“冊”这一点上,存在编纂和流通过程中的复杂性问题。
最终,正如通过对《尙书》的两派解释所直接体现的那样,“疑古派”和“信古派”的争论只是被某种政治意图和目的下形成的“阵营逻辑”掩盖了论点的本质,而在两者使用的方法上实际上并无区别。结果,通过对顾颉刚的《禹贡》编辑和《尙书》研究的具体分析,可以发现顾颉刚的古史研究与其“救国”两者之间是密切相关的。进一步说明,因出土文献的泛滥,“信古派”逐渐占上风的当今中国史学界的趋势下,顾颉刚的“疑古”的方法依然未错。

목차

머리말 1
1. 顧頡剛의 현실 참여와 ‘救國’의 의미 7
2. 학술잡지 禹貢의 편집과 ‘救國’ 18
3. 尙書 연구와 ‘救國’ 37
1) ‘國粹主義’와 ‘信古’派의 비판 37
2) ‘疑古’에 대한 오해 42
맺음말 56
부록 59
참고문헌 65
中文摘要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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