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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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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이옥빈 (울산대학교, 울산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이종서
발행연도
2016
저작권
울산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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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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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명에 대하여 사대하면서 변방의 이적에 대해서는 내조(來朝) 및 귀화를 장려하였다. 이것은 그들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을 확인하는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그들이 변방을 침입해옴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분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회유책이었다.
조선에 귀화한 야인 및 왜인을 조선은 ‘향화(向化)’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향화’ 조선의 어진 정치에 감화되어 그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향화’라는 단어는 화이론(華夷論)적 관념에 따라 이(夷)의 영역에 속하던 사람이 화(華)에 해당하는 조선의 품으로 옮겨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것은 조선의 세계인식을 드러내는 단어이기도 하다.
1609년 울산호적에는 20호 33인의 북방계 향화인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 향화인은 동면 농소리와 유등포리, 남면 온양리에 나누어 거주하고 있었다. 동면 농소리 향화인은 모두 4대째 향화가계를 이어오는 대원(大元)본관 향화인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향화인끼리의 폐쇄적인 혼인관계를 유지하며 조선인 마을의 중심부와 떨어져서 그들끼리의 집단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동면 유등포리와 남면 온양리에는 다수의 흑룡강 본관 향화인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농소리의 향화인에 비해 조선인과의 혼인비율이 높고 거주지역도 조선인의 이웃에 위치하였다.
조선시기 호적에는 성, 이름, 본관 등을 표기하였는데 본관은 그 사람의 출신지역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귀화인의 본관은 어떻게 표기하였을까? 조선시기 귀화인은 지위나 공로에 따라 국가로부터 본관을 내려받는 경우가 있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중국’, ‘일본’과 같이 귀화 이전의 국적을 본관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재로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에서도 ‘대명(大明)’ ‘대원(大元)’ ‘원조(元朝)’ 등과 같은 국적 표기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향화인의 출신지역을 나타내는 본관 정보에 근거하여 그들의 원거주지가 어디이고 언제부터 한반도에 거주하게 된 것인지를 추론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에서는 여진인들이 송화강과 목단강이 흘러 흑룡강과 합류하는 곳에서 거주하다가 원 쇠퇴기에 조선의 북변으로 이주해왔던 사실에 근거하여 흑룡강 본관의 향화인은 조선전기 귀화한 여진인 또는 세종시기 여진야인 정벌시 포로가 된 사람들의 후예로 판단하였다. 조선전기의 대여진 교린정책 및 귀화 장려책으로 다수의 여진인 귀화자가 있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기에 흑룡강 본관 향화인을 여진계통의 귀화자로 보는 것은 기존의 연구의 흐름과도 일치한다.
반면 대원(大元) 본관에 대해서는 당시 사람들의 대원본관에 대한 인식과 국내외 상황을 분석하여 대원제국을 그 출처로 하는 사람들로 판단할 수 있음을 보였다. 그 판단의 근거로는 귀화인이 본관으로 국적을 썼다는 사실, 1605년 당시 선조(宣祖)가 대원본관을 대원제국에서 온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점, 대원제국으로부터 제주도에 파견된 목자들의 후손으로서 대원본관을 쓰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점, 세종실록에서 함경도 길주목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대원으로부터 왔음을 기록하고 있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고려말 원명교체의 혼란기에 요동지역으로부터 다수의 인구유입이 있었던 점, 조선 전기에 대원본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이주해올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던 점, 혹여 여진인의 신분으로 귀화해 온 몽골계통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대원이라는 이름의 본관을 사용하기 어렵다는 점 등에 근거하여 이들이 고려말 원명교체기 요동지역이 혼란해진 상태에서 고려에 유입된 사람들로서 대원제국을 자신의 원거주지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후손으로 판별하였다.
울산의 향화인들은 고려말 또는 조선 전기부터 1609년까지 150년 내지 200년의 기간 동안 향화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이렇게 오랜 기간 이들이 조선사회에 흡수되지 않고 향화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원인 분석을 위해 국가 관리의도가 작용했을 가능성과 향화인들이 향화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동기가 약했던 사회적 환경을 검토해 보았다. 더불어 1609년 무렵 장기간 향화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며 조선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향화인 사회에 해체의 조짐의 나타나면서 조금씩 조선인 사회에 섞여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목차

Ⅰ. 서론 1
Ⅱ. 울산거주 향화인의 원 거주지 3
1. 여말선초의 인구유입과 조선의 향화인 분포 3
2. 울산호적의 향화인 분석 6
1) 향화인 분포와 주거지 6
2) 향화인의 혼인 관계망 9
3) 향화가계의 본관 12
3. 본관정보에 근거한 원거주지 추정 14
Ⅲ. 울산거주 향화인의 이주시기와 장기지속 18
1. 한반도 이주시기 18
2. 향화가계의 장기지속과 변화 22
1) 향화가계의 장기지속 22
2) 향화인 사회 해체의 조짐 26
Ⅳ. 결론 30
참고문헌 32
부 록 34
Abstract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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