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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이수현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홍나영
발행연도
2016
저작권
이화여자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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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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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시대 문직물의 수입을 시기별 무역 형태의 변화를 통하여 문헌에 나타난 복식 사치와 출토된 직물 문양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후기 경화세족(京華世族)을 비롯한 지식인들의 복식관(服飾觀)에서 보이는 변화가 문양 선택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는 것이다. 조선의 문헌을 고찰함으로써 견직물이 수입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출토직물을 통해 조선의 직물 문양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시기는 조선시대를 15·16세기와 17세기 전반, 그리고 17세기 후반 이후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조선시대 복식에서 시기 구분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한 17세기 전반을 기준으로 삼는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 복식의 특징이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직물의 문양에서도 이때를 시점(始點)으로 문양의 소재(素材)와 구도(構圖) 등에서 구별되고 있다. 그러나 왜 이 시기부터 변화가 나타나는지에 대한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 17세기 전반을 따로 구성하여 직물 문양의 소재와 구도에서의 다양성이 나타나는 배경을 살펴보았다.
조선의 전세유물(傳世遺物)이나 출토복식(出土服飾)에 사용된 직물 중 어떤 직물이 수입한 것인지 아니면 국내에서 제직한 것인지를 구별하기는 매우 어렵다. 또한 당대에 유행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직물 문양에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미의식이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 직물 문양의 소재와 크기까지도 신분(身分)과 성별(性別), 품계(品階) 등으로 사용에 제한을 가했던 것을 감안하면 명(明)과 청(淸)과의 무역에서, 적어도 공무역에서는 어느 정도의 규칙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형적인 조공책봉체제(朝貢冊封體制) 하에서 조공사행(朝貢使行)의 공무역을 통해 수입된 15·16세기의 직물 문양은 정형화(定型化)된 운문(雲紋)과 화문(花紋)이 대부분이었다. 16세기 명의 관영수공업 체계가 무너지고 민영수공업이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문양이 다양해지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16세기 문양에서도 만자운문(卍字雲紋)이라는 새로운 소재와 사양화문(四樣花紋)의 문양이 명료해지는 등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런 현상에는 16세기에 사무역을 통해 사라능단(紗羅綾段) 등이 수입되었던 사실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17세기 전반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하였음에도 조선에서는 상당히 많은 계층이 중국 직물로 된 의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복식에서 사치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중국의 직물이 수입되고 있었음을 방증(傍證)하는 것이다. 중국의 견직물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明軍)을 따라 들어왔던 명의 상인들에 의해 판매되었다. 이들은 명군이 철병한 후에도 조선에 남아 지속적으로 교역에 참여하고 있었다. 또 다른 견직물이 수입되는 곳은 중강개시(中江開市)였다. 전쟁 중 발생한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개설되었던 개시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명(明)과 조선, 일본, 그리고 여진족이 모여 자유로이 무역을 하게 되었다. 중강개시가 1613년 폐지되고 요동에서 후금이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명의 모문룡(毛文龍)이 조선의 가도(??)에 동강진(東江鎭)을 세우고 개시를 열었다. 산동(山東)을 비롯한 강남지역에서 가도로 상선(商船)을 보내 교역을 하였다. 동강진 개시를 통해 명의 견직물이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공무역이 아닌 사무역을 통해 들어온 직물은 다양한 문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조선의 문직물 소비층을 자극하였다. 특히 인조 대에는 김자점(金自點)이 주도하여 상의원(尙衣院)의 금단(錦緞) 제직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해 중국으로 장인을 파견하였다. 상의원의 직조기술은 이때를 기점으로 진전을 보아 아름답고 화려한 직물을 생산할 수 있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청과의 무역을 통해 문직물을 수입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무역의 중심이 조공무역에서 사행(使行)을 할 때 발생한 밀무역인 후시(後市)와 중강, 경원(慶源), 회령(會寧)의 국경에서 이루어진 개시로 옮겨갔다. 게다가 17세기까지 역관(譯官)들이 무역을 주도했었다면, 그 이후에는 사상(私商)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사무역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중개무역(仲介貿易)는 17세기 말 청에서 해금정책(海禁政策)을 폐지하면서 점차 감소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문단(紋緞) 등에 대한 소비는 여전하여 은(銀)이 중국으로 유출되었고 결국 국가 재정이 급감하였다. 은의 중국 유출을 막고 사치를 억제하기 위해 영조와 정조는 문단의 수입과 직조를 금지하였다. 그렇지만 고급 직물에 대한 소비욕은 사라지지 않아 중국 직물의 수입은 멈추지 않았다.
18세기 실학사상(實學思想)이 대두하면서 경세치용(經世致用)과 북학론(北學論)이 대두(擡頭)하였다. 여진족이 세운 청을 배척하던 상황에서 청에서 발전된 경제와 문화를 경험하여 중국의 기술과 문물을 수용하고자 한 북학론자들의 복식관(服飾觀)에서 청의 복식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나타나고 있다. 즉, 조선의 지식인들은 17세기까지 명의 복식을 전범(典範)으로 삼아 청의 복식은 오랑캐의 것으로 무시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단추 사용과 착수의 소매, 그리고 말을 타기 편리한 차림, 복식을 통한 명확한 품계 구분 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 북경(北京)에 사행을 다녀왔던 지식인들이 기록한 연행록(燕行錄)에서 현저(顯著)히 나타나고 있다. 북학론자들의 변화된 복식관은 조선 직물의 문양에도 영향을 미쳤다. 18세기까지 조선이 선호하는 문양은 청과 매우 상이(相異)하였으나 19세기 이후 청의 직물에서 자주 보이는 문양들로 만들어진 복식이 보이고 있다. 이는 복식관의 변화가 직물 문양의 선택에도 반영된 결과라 생각한다.

목차

I. 서 론 1
A. 연구 목적 및 의의 1
B. 연구 범위 및 방법 3
II. 15 · 16세기 사행무역을 통한 문직물의 수입 5
A. 조선 전기 조명 사행무역 5
B. 명대 견직업(絹織業)의 발전과 문직물 8
1. 명대 견직업의 발전 8
2. 명대 견직물의 발달 10
3. 명대 직물의 문양 12
C. 사행무역을 통해 수입된 문직물 17
1. 공무역으로 수입된 문직물 17
2. 왕실(王室)과 권문세가의 사치품, 문직물(紋織物) 22
3. 조선과 명 직물 문양의 유사성 26
III. 17세기 전반 동아시아의 다자무역과 문직물의 수입 33
A.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와 조선의 중개무역(仲介貿易) 33
B. 전란 중 복식의 사치풍조와 그 배경 37
1. 17세기 전반 복식의 사치현상 37
2. 복식 사치가 가능했던 배경 38
C. 조선의 중개무역과 다양한 직물 문양 45
IV. 17세기 후반 무역을 통한 문직물의 수입 52
A. 청의 견직업 재건과 조청 무역 52
1. 청의 견직업 재건 52
2. 조청 무역 56
B. 영정조의 문단(紋緞) 금지와 문직물 수입에 미친 영향 59
1. 17·18세기 초 문단 수입과 복식 사치 59
2. 영정조의 문단 금지 조치와 그 영향 60
C. 조선의 복식관(服飾觀) 변화와 직물 문양의 변화 65
1. 연행록 속에 나타난 복식관의 변화 65
2. 17세기 후반 이후 직물 문양의 변화 67
V. 결 론 72
참 고 문 헌 74
ABSTRACT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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