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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권순홍 (성균관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김영하
발행연도
2014
저작권
성균관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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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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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연구에서는 무관한 개별사실들을 하나의 이치로 읽어내는 연기적 사고가 필요할 때가 있다. 고구려 초기 역사의 쟁점 주제인 초기 도성의 천도시기 문제와 왕실교체시기 문제는 종래에 각각 별개의 주제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양자를 함께 고려했을 때 해석의 새로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중심세력의 교체는 중심지의 교체도 수반할 것이라는 가설을 바탕으로, 도성의 ‘이동’인 遷都가 아니라, ‘교체’로서의 改都라는 개념을 통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사료 상에 나타나는 고구려 도성의 특징들을 바탕으로 졸본과 흘승골성, 국내 위나암에 대한 구체적인 위치를 비정하였다. 종래에는 졸본과 흘승골성을 동일처 혹은 같은 지역 내의 평지성과 산성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사료 상에서 졸본(홀본)과 흘승골성(성산)은 기능상으로도 구별됨과 동시에 지리적으로도 구분되었다. 졸본이 실제로 고구려 최초의 도읍이라면, 흘승골성은 4세기 이후 생성된 신화 속에서 신성성을 부각하기 위해 설정된 건도지였다. 또, 흘승골성이 외형상으로 ‘성같은 산’이었으므로 오녀산성에 비정된다면, 졸본은 오녀산성의 동쪽에 있는 혼강과 부이강의 합류지점, 즉 北甸子鄕 喇哈城 일대로 비정될 수 있었다. 한편,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인 국내 위나암성은 대체로 오늘날의 집안으로 비정해 왔다. 그러나 사료 상에 나타나는 위나암성의 지형적 특징과 유리왕 33년의 정복기사에 나타난 ‘西伐’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국내 위나암성은 오녀산성, 이때의 국내는 오늘날의 환인현 중심지 일대로 비정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이와 같이 졸본과 국내 위나암이 공히 환인 지역 내에 위치했다면, 사료 상에서 집안으로의 천도기사로 볼 수 있는 것은 산상왕 13년의 환도 천도뿐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앞선 산상왕의 즉위과정에서 발생한 왕위계승 분쟁과 관련지어 볼 때, 요동의 공손씨에 의해 파훼된 평지성[故國]에서 방어산성인 환도성[新國]으로 옮겨간, 집안 지역 내에서의 천이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산상왕 13년의 천도기사는 환인에서 집안으로의 천도를 의미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산상왕 13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의 도성은 집안에 있었던 셈이다. 사료 상에 등장하지 않은 천도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를 본 논문에서는 고구려 초기의 왕실교체에서 찾았다. 『삼국지』에 따르면, 고구려 왕실은 연노부에서 계루부로 교체되었는데, 그 시기에 대해서는 동명왕대설?유리왕대설?태조왕대설이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동명왕대설과 유리왕대설은 환인 지역 내에 연노부와 계루부가 공존하게 되는 역사지리적 난점을 극복하기 어렵다. 반면, 태조왕대설은 태조왕을 기점으로 한 고구려 왕실세계의 단층과 왕호가 갖는 시조적 성격 등으로 봤을 때,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즉 고구려 초기의 왕실교체는 태조왕대 이루어졌고, 이때 중심세력의 교체는 중심지의 교체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태조왕의 즉위에 따라 고구려의 도성은 소노부의 중심지인 환인에서 계루부의 중심지인 집안으로 교체되었고, 이것이 곧 개도였던 것이다.

목차

머리말
Ⅰ. 고구려 초기 도성의 위치 비정
1. 卒本과 紇升骨城의 위치
2. 國內 尉那巖城의 비정
Ⅱ. 환인에서 집안으로의 개도 시기
1. 山上王代 천도기사의 검토
2. 太祖王代 왕실교체와 改都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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