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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강동호 (제주대학교,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지도교수
양진건
발행연도
2013
저작권
제주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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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조선시대 제주교육의 역사적 특징과 성격을 유배를 통해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그동안 통상적으로 써왔던 “유배인의 교학활동(敎學活動)”이라는 표현 대신에 ‘제주유배교육(濟州流配敎育)’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제주유배교육은 조선시대, 제주라는 시대·지역적 상황과 유배라는 형벌이 만들어낸 제주의 독특한 교육문화이다. 제주유배교육을 통해 조선시대 제주교육의 역사는 한층 깊어지고 더욱 다양해졌다. 조선시대 제주유배교육의 역사는 크게 전기와, 중기, 후기, 말기 등 4시기로 대별되었다. 각 시기 마다 제주유배인의 현황과 그들 가운데 특별히 제주교육에 영향을 끼쳤던 유배인들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제주유배교육의 의미와 그것이 조선시대 제주교육의 역사와 어떤 상관이 있는지를 규명하였다. 제주교육의 역사 가운데 조선전기는 태조조(太祖朝 1392)에서 인종조(仁宗朝;1545) 기간으로 이른바 ‘제주유배교육의 태동기(胎動期)’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왕조의 중앙집권체제가 성리학적 교육이데올로기에 의해 강력하게 구축되던 시기이다. 특히 조선전기는 체제의 제도적 정비라는 차원에서 국가교육의 형식 확충이 시급히 요망되었으며 그러한 문교정책적(文敎政策的) 필요성에 부응하여 제주도에도 교육의 형식적 기틀이 갖추어지게 되던 때였다. 이 시기에는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 이른바 사림파와 훈구파의 갈등으로 빚어진 4대 사화(士禍)로 인해 여러 유배인들이 제주도로 보내지게 된다. 이들 가운데 특히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교육이데올로기를 신봉했던 사림파들이 제주도에 유배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제주교육은 일찍부터 사림의 교육사상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들 가운데 ‘충암(沖庵) 김정(金淨)’과 ‘이세번(李世蕃)’은 당대 최고의 교육자였던 조광조(趙光祖)와 교우(交友) 또는 사제관계(師弟關係)를 맺었던 사람으로서 제주교육에 남다른 사상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조선중기는 명종조(明宗朝 1546)에서 숙종조(肅宗朝 1720)의 시기로써 ‘제주유배교육의 성숙기(成熟期)’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볼 때 당쟁으로 관료 상호간의 권력암투가 심대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이 발전, 심화되던 때였다. 제주도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중기는 출륙억제(出陸抑制)라는 제도적인 금압정책(禁壓政策)이 강요됨으로써 대외적인 교육진출의 길이 거의 봉쇄된 상황에서 교육이 전개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당쟁으로 인해 빈번해진 유배인과 제주인들과의 교육관계는 어느 정도 그러한 교육적 위축을 보상해 줄 수 있었는데 제주도 귤림서원(橘林書院)의 건립과 오현배향(五賢配享)은 보상의 상징적 의미를 띠고 있었다. 이 시기는 천하를 평정한 사림파들이 자파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 뭉침으로써 발생한 당쟁 때문에 많은 중앙 지식인들이 제주도로 유배를 오게 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16세기, 17세기에 이루어진 조선 성리학 교육사상의 백미(白眉)들이 제주도에 소개될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 제주교육은 한층 성숙해질 수 있었다.
조선후기는 경종조(景宗朝 1721)에서 고종조(高宗朝 1896)의 시기로써 ‘제주유배교육의 실천기(實踐期)’라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들면서 사회는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인한 제반폐해(諸般弊害)와 계속되는 재난 때문에 국가재정은 위축일로에 있었고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인한 세정(稅政)의 불공정과 지방 관리의 불법수탈로 말미암아 국가경제는 파탄에 직면하고 있었다. 반면에 민중의 지식수준은 날로 향상되어 그들의 문제의식은 차츰 높아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부조화 현상 속에서 한 시대의 정신이념이었던 유학 안에는 성리학과 대조적인 사조가 잉태되고 있었다. 이러한 성리학의 반정적(反正的) 흐름인 실학과 성리학의 실천 적 사상인 척사위정사상이 제주도에 소개됨으로써 종래와는 다른 제주교육의 전통이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실천적 유배인들의 영향은 훈고(訓?)의 전통에서 제주교육의 전통을 보다 능동적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제주유배인으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을 들 수 있는데 추사의 제주도 제자들이 다양한 문화운동을 전개한 것이나 면암의 사상이 후대에 제주의 의병운동과 3.1만세운동 등의 사상적 배경이 된 것들이 이 시기 제주교육의 새로운 전통들이다.조선말기는 광무 1년(光武1년 1897)에서 융희 3년(隆熙3년 1910)으로 ‘제주 유배교육의 전환기(轉換期)’라고 할 수 있다. 조선 말기는 이른바 개화기(開化期)라고 명명되는 1876년 개항으로부터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될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 시기는 종래의 유교적 전통의 제약 속에서 소수의 개화 사상가들이 서구의 신문화를 섭취하려는 의도에서 근대교육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근대적 교육사상의 형성되고 그것이 대중 속에 침투함으로써 대중적 교육운동이 크게 일어났다는 점에서 여타 의 시기와 그 성격이 다르다. 이 시기는 개화파 지식인들이 제주도에 유배를 오게 됨으로써 제주교육이 구(舊) 교육에서 근대교육체제로 변화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는 중요한 시기이다. 제주도에는 전무했던 여성근대교육이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먼저 가능하게 된 것도 박영효와 같은 개화 지식인의 제주유배가 아니었으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조선시대의 제주교육은 전기, 중기, 후기, 말기를 막론하고 유배인들의 교육적 활동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만큼 조선시대 제주교육에서 유배교육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제주유배교육을 통해 조선시대 교육이데올로기가 제주도에 보급되고, 가르쳐지고, 논의되어 그에 따른 교육전통이 만들어짐으로써 제주교육의 특수한 역사적 양식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목차

Ⅰ. 서 론 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1
2. 연구의 범위와 방법4
Ⅱ. 유배교육의 개념과 시대구분 6
1. 개념6
2. 시대구분8
Ⅲ. 조선시대 제주유배교육사 12
1. 조선전기 12
1) 조선전기 제주교육의 특징12
2) 조선전기 제주유배인 현황 및 특징 15
3) 조선전기 제주유배교육 19
4) 조선전기 제주유배교육의 의미 24
2. 조선중기 27
1) 조선중기 제주교육의 특징 27
2) 조선중기 제주유배인 현황 및 특징 29
3) 조선중기 제주유배교육 34
4) 조선중기 제주유배교육의 의미 43
3. 조선후기 45
1) 조선후기 제주교육의 특징 45
2) 조선후기 제주유배인 현황 및 특징 48
3) 조선후기 제주유배교육 56
4) 조선후기 제주유배교육의 의미 61
4. 조선말기 63
1) 조선말기 제주교육의 특징 63
2) 조선말기 제주유배인 현황 및 특징 65
3) 조선말기 제주유배교육67
4) 조선말기 제주유배교육의 의미 70
Ⅳ. 조선시대 제주유배교육사의 의미 71
Ⅴ. 결론 및 제언 ·76
1. 결론 76
2. 제언 77
참고문헌 79
Abstract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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