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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나영남 (한국외국어대학교, 韓國外國語大學校 大學院)

지도교수
이근명
발행연도
2013
저작권
한국외국어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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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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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도 그 遺民은 오랫동안 하나의 정치ㆍ경제ㆍ문화적 집단을 이루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동북아 역사의 중요한 축을 이루었다. 발해의 유민은 거란의 통치 하에 濊貊系의 渤海人과 靺鞨系의 女眞人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거란 사회의 주요 구성원이었지만 발해 민족사 전체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발해인은 어떤 종족의 遺裔인가? 그리고 그들은 거란의 통치 하에 어떤 存在樣態를 보이는가? 또한 遼金交替期에 발해인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본 연구는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해명을 시도한 것이다.
동북아시아의 10세기는 변화의 분기점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시기에 가장 큰 특징은 契丹의 勃興이다. 당시 거란을 속박하던 唐朝의 통치력이 약화되고 위구르제국이 멸망함으로써 거란은 사회발전의 유리한 환경에 놓이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916년에 耶律阿保機가 건국하기에 이른다. 거란은 중원을 공략하기 위해 그 배후의 적이었던 발해를 한 순간에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東丹이라는 위성국가를 세운다. 그러나 거란 내부의 권력투쟁 및 발해유민의 끊이지 않는 대규모 반요투쟁은 동란의 지배체제를 포기하게 한다. 그 결과 松花江 以東지역에 대한 거란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훗날 金이 遼를 멸망시키는 端緖를 제공하였다.
한편 유목사회와 농경사회를 같이 영유하게 된 거란은 異民族을 통치하기 위해 因俗而治의 민족정책을 채택하여 二重支配體制를 구축한다. 남북지구의 서로 다른 생산방식 및 생활습관과 민족구성에 맞추어 중앙에서는 北南面官制度를 실시하였고 지방에서는 州縣制와 部落制, 屬部制 등을 병존시켜 경제적으로 牧農複合體制를 구축하였다. 하지만 인속이치의 정책은 민족적 차별에 근거하는 내재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각 민족들 사이에 사회적 지위가 불평등하였다. 따라서 요대 발해인이 처한 정치ㆍ사회적 신분은 契丹人ㆍ奚人ㆍ漢人에 비해 낮았다.
이러한 가운데 발해인의 존재양태는 海外亡命, 强制移住, 渤海復興運動 등으로 구체화 된다. 먼저 인구이동과 관련하여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되기 직전부터 대략 200여년이 지나는 동안 많은 발해인은 주변국으로 망명하였다. 동시에 요대 통치자는 발해인을 대규모로 內地에 강제 이주시켰다. 이러한 발해인의 이동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시기마다 이동의 要因과 이주지역도 달랐다. 무엇보다도 발해인은 거란의 통치를 거부했기 때문에 망명했던 반면 거란의 통치자는 반요성향이 강한 발해인을 분산시켜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강제 이주시켰던 것이다. 발해인은 고려를 비롯해 중원, 생여진 지역 등으로 망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요의 상경도, 동경도, 중경도로 강제 이주되었다. 인구 이동의 수가 무려 100만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거란 내지로 강제 이주된 발해인은 지역에 따라 一般州縣 및 斡魯朶州縣, 頭下軍州 등으로 나뉘어 안치되었다.
다음은 발해부흥운동과 관련하여 발해 고지에 잔류한 발해유민은 그들의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발해의 계승국으로 後渤海, 定安國, 兀惹國, 烏舍城浮?府渤海國 등을 들 수 있으나 그들에 관한 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설사 있더라도 서로 뒤섞여 있어 상호관계를 추론하기 힘든 형편이다. 특히 후발해는 정식 국호가 아니며 그 구성조차 학자마다 견해를 달리하고 있어 후발해의 역사적 존재여부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본고는 후발해라는 명칭이 후세 연구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담론이라고 판단하였고 그것에 대해 발해 고지에 존재했던 소국들의 總稱으로 보는 관점을 제기해보고자 했다. 반면 정안국은 의심할 여지없이 역사적 실체이다. 정안국은 列氏 세력이 주도하여 건국하였으나 兀惹와의 통합과정에서 烏氏로 왕이 교체되었다. 정안국은 한때 큰 세력을 떨쳤고 宋朝와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遼 聖宗의 동방경략정책에 의해 거란의 屬部로 전락되고 말았다.
마침내 거란의 통치력이 다시 東滿洲 지역까지 미쳤으나 시간이 갈수록 주체민족과 피지배민족 간에 모순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먼저 성종시기에 東京 遼陽府에서 대장군으로 활약하던 大延琳이 興遼國을 건국하였으나 1년여 만에 진압되었다. 이후에도 古欲과 高永昌의 반란이 이어졌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반요투쟁에 있어서 여진인에게 주역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결국 발해인은 遼金交替期에 宋-遼-金 등 삼국의 역학관계 속에서 개인의 이해타산에 따라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자신들의 국가를 재건하지 못한 발해인은 여진에 합류하여 요를 멸망시켰으며 金朝에서는 특별한 저항 없이 通婚ㆍ任官 등을 통해 스스로를 보존하고자 했다. 그러나 발해인은 요대부터 지속적으로 고려를 비롯하여 여진, 중원, 거란 지역으로 분산되었으며 금대에도 재차 중원으로 강제 이주되었기 때문에 각 민족 중에 融合되어 스스로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발해인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300년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끈질기게 유지했던 예맥계통의 민족으로서 동북아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목차

序論 1
第1編 契丹의 遼東經略과 渤海의 滅亡 14
第1章 契丹의 勃興과 契丹-渤海 關係 14
1. 10世紀 東北亞 情勢의 變化와 契丹의 勃興 14
2. 契丹 建國 前後 渤海-契丹 關係의 變化 20
第2章 渤海의 滅亡과 東丹國의 設置 30
1. 契丹의 遼東經略과 渤海의 滅亡 30
2. 東丹國의 設立과 그 性格 34
第3章 東丹國의 渤海遺民 支配方式 38
1. 東丹國의 政治體制 38
2. 東丹國의 消滅과 그 影響 43
第2編 契丹의 二重支配政策과 渤海人 49
第1章 契丹의 社會構造와 二重支配政策의 確立 49
1. 契丹의 發展과 農耕的 要素의 增大 49
2. 二重支配政策의 指向과 實際 54
3. 二重支配體制下에 民族差別政策 62
第2章 遼代 渤海人의 正體와 社會的 地位 72
1. 渤海의 領域과 住民構成 72
2. 遼代 渤海人의 種族系統 84
3. 遼代 渤海人의 社會的 地位 89
第3編 契丹 支配 下에 渤海人의 存在樣態 99
第1章 渤海人의 海外亡命 99
1. 海外亡命의 性格 99
2. 亡命의 背景과 原因 104
第2章 契丹의 渤海人 移住政策 117
1. 移住政策의 背景 117
2. 渤海 移住民의 安置方式 123
第3章 渤海復興運動과 그 實體 144
1. 이른바 ‘後渤海’의 再照明 144
2. 定安國에 대한 理解 155
第4編 契丹의 滅亡과 渤海人의 動態 172
第1章 契丹 後期 渤海人의 政治鬪爭 172
1. 大延琳의 興遼國 172
2. 高永昌의 大渤海 179
第2章 遼金交替期 渤海人의 活動 186
1. 女眞의 興起와 渤海人의 態度 186
2. 契丹의 滅亡過程과 渤海人 194
結論 204
參考文獻 211
中文摘要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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