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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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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박성연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홍선표
발행연도
2013
저작권
이화여자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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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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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 보림사 대적광전에 봉안된 상으로 배면에 명문이 양각되어 859년 제작이 확인되었다. 기년작 중 우리나라 최초의 철불이며 766년 석남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이후 100여년의 공백을 깬 9세기 최초의 비로자나불상이다. 신라하대 유행한 철불과 비로자나불상의 선구적 작품이자 기년작으로서 다른 철불과 비로자나불의 편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일찍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국보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림사 상이 제작된 신라하대는 잦은 왕위 찬탈과 교체로 인해 왕실은 무력해지고, 민심의 이탈로 지방 분권화는 가속화되어 독자적인 지방 세력이 형성된 시기로 알려졌다. 지방 세력은 왕실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쇠약해진 왕실을 대신해 신라하대 불교미술의 새로운 후원자가 되었다. 신라 중대 불교미술품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지방화, 도식화된 양식은 신라하대 불교미술이 지방세력 후원의 결과라는 인식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또한 신라하대 등장하여 크게 유행한 철불과 비로자나불의 조성 주체 역시 지방 세력으로 간주하는 결과를 낳았다. 철불과 비로자나불의 주 봉안처가 신라하대 유입되기 시작한 지방의 선종 사찰이라는 점은 철불과 비로자나불 그리고 선종 사찰을 지방 세력이라는 공통분모로 더욱 결속시켰다. 그런데 보림사 상의 명문에는 정왕, 즉 헌안왕에게 청하여 왕이 칙서를 내렸다는 내용이 등장하여 혼란을 야기한다.
본 연구는 기존 연구에서 단편적으로 다루었던 양식과 명문 해석을 정리하고, 헌안왕이 보림사 상 조성에 개입한 것이 맞는지, 맞다면 왜 보림사에, 왜 철조비로자나불상을 봉안했는지 후원세력과 후원배경을 중점으로 파악해보려 한다.
우선 현상적인 측면에서 보림사 상의 형식 및 양식을 살펴보겠다. 보림사 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지권인의 수인이다. 지권인은 비로자나 부처의 도상으로, 본래 화엄경의 경주 비로자나는 빛과 같은 존재이므로 형상이 없어 밀교 경전에서 지권인을 차용하여 비로자나를 형상화 하였다. 9세기 지권인 상은 대체적으로 경전에 입각한 지권인을 충실히 따랐다. 얼굴에 있어서는 콧방울을 잘라버린 듯 한 콧등 표현이 가장 특징적이며 아치형의 눈썹, 편편한 콧등, 아래를 향한 눈, 입술 양 끝 주름, 세로의 턱 주름 등이 석굴암 본존불을 이은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유사하다. 신체표현에 있어서는 8세기 불상의 과장된 건장함 대신 현실적 표현이 돋보이며 다소 머리가 크지만 상당히 안정적이다. 옷주름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명문은 불상의 왼쪽 팔뚝 뒷면에 양각되어 있는데, 제작 시기는 명문과 <보조선사창성탑비>의 기록과 종합해볼 때 대중 12년 김수종이 왕에게 건의하여 허락을 받아 헌안왕3년 명문을 찬술하고 선제14년 불상을 완성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발원자는 명문의 ‘김수종’과 <보조선사창성탑비>의 ‘김언경’으로 다른 이름이 나타나는데 현 상태에서는 동일인 여부를 단정 짓기 어렵다.
헌안왕의 보림사 후원은 명문 뿐 아니라 <보조선사창성탑비>와 북탑지를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며, 상당히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헌안왕은 왜 왕경에서 400km나 떨어진 장흥 보림사를 중창하고 후원하였을까.
보림사가 위치한 당시 무주지역은 신라하대 최대 반란인 김헌창의 난 가담지이자 장보고의 청해진이 설치된 지역으로 장보고 살해 이후 반왕실 정서가 팽배했다. 이를 평정한 이가 김양이었고, 857년 김양이 사망하자 서남해안 지역은 분열에 임박했다. 즉위 전 문성왕과 함께 웅주 성주사 무염을 후원하면서 선승 후원의 지방 통제 효과에 대해 알고 있었을 헌안왕은 김양 사후 무주지역 선사를 물색하였고, 체징에 주목하여 과거 원표대덕이 불법으로 정치를 도왔다는 가지산사로 이거를 청했다. 즉 헌안왕의 보림사 후원은 체징을 중심으로 무주지역 민심을 다독이고 수습하여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정치적 조치였으며 왕실과 지방 사찰 선승의 정치적 관계는 당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왕실에서는 선승과의 결연을 지방민에게 알려 왕실의 건재와 위상을 공포해야 했고, 홍보에 가장 효과적인 시각적 매체 불상, 탑, 탑비 등이 후원을 받은 선종 사찰에 조성되었다. 특히 문성왕~헌안왕대 왕실의 후원을 받은 선종 사찰인 실상사, 성주사, 보림사에는 철조 비로자나장육상이 봉안되는데, 이는 왕실의 위상을 알리기에는 더 없이 좋은 구성이었다. 문성왕과 헌안왕이 지방의 선종사찰을 후원하면서 철조 비로자나장육상을 봉안했다는 점은 강한 왕권 회복의 표현이며 의지의 표명이다.
본 연구에서는 신라하대 유행한 선종과 철불, 비로자나불의 최초 후원 세력이 왕실임을 확인했다. 신라하대는 결과적으로 망국의 과정이었지만 왕들은 나름의 노력과 시도를 통해 재흥을 꿈꿨다. 통일신라의 멸망을 목격한 오늘날 우리는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망국의 원인과 과정 연구에 초점을 두었고, 왕실 나름의 대응과 시도는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그나마 최근 진행된 신라하대 왕실 관련 연구는 경문왕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경문왕을 신라하대 중흥기를 이끈 인물로 평가하였다. 이에 반해 재위기간도 짧고 사료도 거의 남아있지 않은 헌안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보림사 상은 경문왕 이전에 이미 헌안왕의 왕권 회복 노력과 기틀 마련이 있었음을 대변하는 존재로 의의가 있다.

목차

Ⅰ. 머리말 ... 1
Ⅱ. 형식 및 양식 ... 4
1. 수인: 지권인 ... 4
1) 지권인과 비로자나 ... 4
2) 9세기 지권인과의 양식 비교 ... 8
3) 9세기 후반 노사나의 유행 ... 11
2. 얼굴 ... 18
3. 신체표현과 착의법 ... 19
Ⅲ. 명문 분석 ... 22
1. 명문과 단순 해석 ... 22
2. 제작 시기 ... 24
3. 발원자 ... 32
1) 김수종은 누구인가 ... 32
2) 김언경은 누구인가 ... 35
3) 김수종과 김언경 ... 35
Ⅳ. 보림사와 신라 왕실 ... 38
1. 헌안왕과 보림사 ... 38
2. 헌안왕의 후원 배경 ... 41
3. 왕실과 선승 결탁 사례 ... 46
4. 신라하대 왕실과 철조 비로자나 장육존상 ... 53
5. 경문왕대, 헌강왕대(체징 사후) 보림사 ... 57
1) 경문왕과 보림사 ... 57
2) 헌강왕과 보림사 ... 61
Ⅴ. 맺음말 ... 64
참고문헌 ... 67
도판 목록 ... 74
도판 ... 77
Abstract ...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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