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는 이차돈 순교 관계기사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여, 의사결정방식을 중심으로 법흥왕 14년의 불교공인회의를 살펴보았다. 이에 따라 6세기 前半, 즉 상고기에서 중고기로 이어지는 시기의 의사결정방식을 검토하는 가운데 법흥왕대 불교공인회의의 전개 과정 속에서 국왕과 군신의 갈등 양상과 그 해소 방식을 주목하고, 불교공인회의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지증왕대에는 部 중심의 정치형태와의 관련 속에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다. 의사결정과정에는 국왕 혹은 갈문왕과 干群소지자가 참여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공동으로 논의하고 결정한 후에 敎를 내리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敎는 국왕(갈문왕)의 명의로 발표되었으며, 금석문상의 표현은 敎가 회의 주체들의 共論을 통한 것임을 명시하는 것이었다. 또 典事人·使人 등 실무자가 있어 회의 결정 사항을 집행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중성리비?와 ?냉수리비?에서 잘 드러난다. 그런데 ?봉평비?에서는 기존에 회의 결정 사항을 집행하는 실무자였던 奈麻群이 干群과 함께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는 존재로 나타나고 있어, 귀족들이 국왕을 중심으로 한 관료적 성격으로 재편되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공동 명의의 敎를 공포하고, 新羅 6部의 이름으로 煞牛儀式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3년 뒤, 법흥왕은 불교공인을 둘러싼 1차 불교공인회의에서 共論을 통한 창사가 불가능해지자 공론을 통한 下敎의 원칙을 깨고 왕 단독의 詔를 통하여 흥륜사 창건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에 대한 군신들의 쟁론이 일자 법흥왕은 여전히 공론의 형식을 따르는 2차 불교공인회의와 이차돈의 희생으로 자신의 무혐의를 입증하였다. 그리고 이차돈의 건의로 시작된 2차 회의에서 회의 주체들 사이의 의견이 대립하여 끝내 수렴되지 않자, 법흥왕은 ‘양 쪽을 모두 따를 수가 없다’고 하며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이에 따라 당시까지의 흥륜사 창건 공사는 더 이상의 진행이나 철거 없이 그대로 유보되었다. 그런데 이는 결과적으로 흥륜사가 사찰로서 기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흥륜사는 법흥왕 14년에 창건 공사가 중단되었으나, 부분적으로 시설을 갖춘 상태에서 그대로 창사하고 법흥왕 개인 혹은 왕실의 사찰로서 기능하였다. 법흥왕 22년에는 공사를 크게 再開하며 불교의 공인이 이루어졌으며, 진흥왕 5년에 落成되기에 이른다. 법흥왕 14년에 군신들은 흥륜사 창사와 국왕의 의사결정권 독점 시도를 저지하였고, 법흥왕은 共論을 통한 下敎라는 원칙을 지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흥왕은 흥륜사 공사를 유보시킨 이후로 몇 년에 걸쳐 결국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나갔다. 결과적으로 ?봉평비?에서는 살우의식으로나마 담보되었던 6부 합의의 共論이 불교공인회의에서는 그 힘을 잃고, 공론의 형식 속에서 실질적으로는 국왕이 의도한 결과에 따르게 된 것이다. 6부 세력 중심의 共論의 무력화는 국왕을 대신한 귀족회의의 주재자로서 상대등 설치로 연결되었다. 불교공인회의에서 시도되었던 국왕의 의사결정권 독점은 이후 진흥왕대의 ?적성비?에서 그 실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자주적인 연호의 사용이 시작되었으며, 재위 초에 牟卽智寐錦王이었던 법흥왕은 聖法興大王??卽知太王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법흥왕 14년의 불교공인회의는 신라 정치의 중요한 화두로 작용하여 의사결정방식의 변화와 불교의 공인, 그리고 왕권의 위상 강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결국 6부 세력 중심의 정치가 이루어지던 上古期에서 국왕의 국정운영권이 강화되어 국왕 중심으로 국가운영체제가 재편된 中古期로의 이행과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