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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현규 (순천향대학교)
저널정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 군사 제133호
발행연도
2024.12
수록면
171 - 201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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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고에서는 정유재란 시기 고금도 통제영 시기 명 수군의 참전과 활동에 대해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명 수군의 파병은 정유재란 직전에 선조가 일본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로지 주사이니 명 수군과 조선 수군이 연합하여 적들을 섬멸해주기를 바라는 요청에서 발단되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명 군부는 자국의 영해를 사전에 방비하고 조선 수군의 병력 부족을 들어 수군 5천명을 편성하였다. 칠천량 해전 직후 명 군부는 크게 2차례 수군 조달 방안을 거쳐 총 2만 1천명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순천 왜교성 전투 때 참전한 명 수군의 병력은 1만 9천 8백명이고, 여기에다 미도착한 張良相의 수군 1천 5백 명을 더하면 당초 명 수군 조달 방안의 병력 규모와 거의 일치한다.
陳璘은 당초 육군인 광동영병을 거느리고 육로로 오다가 도중에 수군부장 楊文의 질병으로 부임할 수 없자 그 직책을 이어받아 조선 해역에 참전한 명 수군을 총괄했다. 鄧子龍은 절강수군을 거느린 沈茂가 육군으로 보직 변경이 되자 그 자리를 이어받아 조선 해역에 나왔다. 참전 당시에 수족이 마비되고 귀가 먹었으나 노량해전 때 최일선에서 돌격하다가 끝내 전사했다. 진린이 등자룡이 늙고 쇠약한데 참전했다가 죽게 되었다는 말을 남겼듯이 명 수군의 수뇌부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은 견제와 마찰이 있었다. 李金은 가장 먼저 고금도 통제영에 내려와 첫 번째 조명연합수군을 결성했다. 고금도 관왕묘의 창건은 진린이 주도하고, 계금이 조력했다.

목차

초록
1. 서론
2. 정유재란 명 수군 파견 과정
3. 『壬辰筆錄』의 陳璘 논평
4. 『壬辰筆錄』의 鄧子龍 논평
5. 고금도 관왕묘의 조력자 李金
6.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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