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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신영주 (국립중앙박물관)
저널정보
한국민화학회 한국민화 한국민화 제21호
발행연도
2024.12
수록면
341 - 37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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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에는 다양한 목적으로 서양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언더우드(Underwood), 아펜젤러(Appenzeller), 길보른(Kilbourne)과 같이 근대 교육과 선교 활동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들 외에도 2~3세대에 걸쳐 한국에 거주한 재한 서양인이 있었다.
메리 테일러(Mary L. Taylor)는 1917년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후 남편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를 따라 한국으로 이주했다. 1919년 아들 브루스 테일러(Bruce T. Taylor)를 출산하고,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 당한 1942년까지 한국에서 거주하며 한국에서의 일상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겼다. 이를 토대로 ‘딜쿠샤’ 복원이 이루어졌으며, 당시 생활사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3·1운동과 제암리 학살 사건을 국제사회에 알리는데 공헌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앨버트 테일러는 한국미술품 애호가로 많은 예술품을 수집하고 또 판매한 사업가였다. 메리가 남긴 사진과 기록에서는 테일러 상회와 딜쿠샤에서 소장하고 있었던 다양한 미술품이 확인된다.
1889년 일본에서 태어난 영국인 아서 고먼(Arthur Gorman)은 1910년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 한국지사로 파견되어 주재원으로 한국에서 거주했다. 1921년 일본에서 캐슬린 스미스(Kathleen Smith)와 결혼한 후 한국에서 계속 생활하다가 1929년 사망하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1934년 캐서린 고먼은 두 자녀와 함께 유학길에 오르고 이후 본국인 캐나다로 돌아가지만, 1936년 생활기반이 있던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극히 드문 사례이다. 캐슬린 고먼 또한 상당히 많은 양의 사진·편지·신문 스크랩 등 한국에서 거주할 당시의 기록을 남겼는데, 이 중 일부를 2023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일제강점기 재한 서양인들은 그들만의 사회를 만들어 공동체를 형성했다. 국제 사회에서 조선·대한제국이 잊혀가던 1920~40년대에도 재한 서양인들은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인들과 직간접적으로 교류하며 오리엔탈리즘, 제국주의적 시선에서 일본의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시각과는 분명 다른 한국의 문화·예술·역사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1920~1930년대는 일제가 비교적 서양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시기였다. 재한 서양인들은 공동체를 통해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정보와 취향을 공유했다. 따라서 당시 관광객을 대상으로 판매된 공예품이나 수출을 목적으로 제작된 미술품과 재한 서양인들이 수집한 미술품은 확실히 다른 경향성을 보인다.
재한 서양인들은 실용성과 장식성을 갖춘 공예품, 장식과 감상을 목적으로 했던 미술품뿐만 아니라 사대부 초상화 또한 수집·소장하였음이 확인된다. 두 가족이 기증한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서양인 사회와 미술품의 유통, 재한 서양인들의 한국미술품 수집 경향과 선호에 대하여 확인해 볼 수 있다. 또한 소장자와 배치 공간의 변화되면서 고동서화가 본래의 용도와는 다르게 전용(轉用) 되었음 또한 확인할 수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1910~1940년대 재한 서양인 사회
Ⅲ. 서양인을 대상으로 한 미술품의 유통
Ⅳ. 재한 서양인들의 거주공간과 미술품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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