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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정민 (명지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미술사교육학회 미술사학 美術史學 第47號
발행연도
2024.2
수록면
93 - 125 (33page)
DOI
10.14769/jkaahe.2024.02.4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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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각 명문은 그릇 전체가 시유된 양질 백자에 변하지 않고 오래가는 내용을 표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백자가 사용되는 과정에 표기된 것이므로 명문의 내용을 통해 그릇의 소유자, 용도 등을 가늠할 수도 있다. 특히 한양도성은 현재까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조선 시대 점각명 백자가 궁궐에서부터 민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에서 출토된 곳이다. 조선 시대 한양도성에서는 관청과 개인 모두 점각 명문을 이용하여 양질 백자의 소유 상황이나 용도의 변화를 관리했다.
점각 명문이 표시된 백자들은 대부분 관요에서 만든 양질의 백자들이며, 점각 명문은 주로 왕실과 관청 범주에서 관물을 관리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명문을 한자, 한글, 부호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기하고, 이러한 표기 방법은 시기에 따라 차이를 드러낸다.
조선 전기 점각명 백자의 내용은 관청과 개인 모두 주로 소유 관계의 변화나 소유주를 표시한 것들이 다수이고, 제기 등으로 그릇의 용도가 변화한 것도 점각했다. 명문 표시 방법은 주로 한자와 한글을 중심으로 일부 부호도 활용되었다. 16세기까지는 점각명 백자가 주로 궁궐과 여러 관청을 중심으로 인근에 자리한 주거지에서도 출토되었다. 이는 주로 사옹원의 관요에서 제작한 양질의 백자가 관청 이외의 여러 장소에서 포괄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서울 시내에서 출토된 점각명 백자는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것들이 다수이고 17세기와 18세기에 해당하는 백자에는 점각 명문의 표기가 크게 줄어들었다가 19세기에는 다소 증가하는 양상을 나타낸다. 18세기 이후에 해당하는 점각명 백자는 주로 궁궐을 중심으로 일부 지역에 한정하여 출토되는 것이 특징으로 민간에서는 점각 명문을 활용한 백자 관리 양상을 확인하기 어렵다. 명문은 대부분 한글로 표시되었으며, 주로 소유처가 그릇에 점각되었다. 18세기 이후에는 소유처에 간지(⼲⽀), 크기, 수량 등의 정보가 단계적으로 추가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점각명 백자의 분포 범위와 출토 양상
Ⅲ. 표기 방식으로 본 점각 명문의 변화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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