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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아름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극예술학회 한국극예술연구 한국극예술연구 제48호
발행연도
2015.6
수록면
285 - 319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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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은 한국 영화의 중심이자 거장으로 간주된다. 1962년부터 영화를 찍기 시작하여 2015년 102번째 영화를 발표하기까지 그가 겪어온 세월은 그 자체로 영화사가 되었다. 그러나 임권택이 이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엄밀히 말해 1980년대부터인데, 이 글은 바로 이 시기 영화계의 욕망들이 어떻게 임권택 감독을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했는지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임권택은 1981년 발표한 <만다라>가 국제영화제에 진출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국제사회에 한국의 성장을 알리고 과시하기 위한 노력이 다각도로 이루어지고 있던 때에 임권택은 국제영화제에 한국이라는 지역을 알리며 중요한 자리를 점하게 된다. 이 과정 중 발생한 일련의 잡음들은 임권택의 영화가 단지 과시용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면서 영화 예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했다. 이 시기 임권택은 자신의 영화를 상업적인 영화와 자신의 의지를 바탕으로 찍은 영화들로 구분하기 시작하는데, <만다라>는 순수한 한국 영화의 성과로 자리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임권택의 인식은 당시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권 영화를 비판하던 비평계의 욕망과 맞닿으면서 비평계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냈다. 오랫동안 다양한 영화를 찍어온 임권택은 이론적인 의미에서 작가로 규정될 수 없었지만, 임권택이 영화계에 몸담은 시간을 바탕으로 장인으로 인정하고, 유럽영화인들과 임권택을 동일한 선상에 놓으려는 욕망 속에서 그는 작가로 전환된다. 이 사이 임권택은 자신의 땅을 불쌍하다는 감상적 심상 아래 두고 셀프오리엔탈리즘과 대상화된 여성의 몸을 통해 한국의 이미지를 형성해나간다. 임권택이 해방 후 한국 영화계의 산증인이자 역사임은 분명하지만, 현재의 명성에 덧붙여진 무게는 한국 영화계가 욕망하는 감독상을 통해 서서히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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