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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반병률 (한국외국어대학교)
저널정보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한국학연구 제25호
발행연도
2011.11
수록면
7 - 48 (4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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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봉우(桂奉瑀, 1880~1959)가 1916년 11월 일제당국에 의해 북간도 하마탕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거주제한을 받고 있다가 국내를 탈출한 것은 1919년 3?1운동 이후의 일이다. 3월 1일 당시 계봉우는 남대문 일대에서 3?1만세시위운동을 직접 목격하였다. 계봉우는 3?1운동 조직자의한 사람으로 제2차 만세시위운동의 지휘책임자였던 보성전문학교생 강기덕에게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하여 넘겨주기도 하였다. 1919년 8월경 원산에서 후일 신임 사이토총독 저격사건의 주역이 되는 강우규의 동지 최자남의 도움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는 데 성공하였다.가족을 만나기 위해 북간도에 간 계봉우는 북간도 국민회의 위촉을 받아 3?1운동 이후 조직된 북간도 각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그 후 국민회의 파견으로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파견되었다. 철혈광복단 단장으로 선임된 계봉우는 임시정부와 국민의회의통합을 반대하는 일부 철광단 단원들의 소수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상해로 가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계봉우는 상해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면서 『독립신문』에 러시아와 북간도의 이주사와 민족운동에 관한 글들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집필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김립의 권유에 따라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사회주의 신수(社會主義 神髓)』를 읽고 한인사회당에 가입하였다. 계봉우가한인사회당에 입당한 동기는 민족의 완전한 독립과 진정한 자유 그리고영원하고 안전한 생존권 확보를 위해서는 사회주의혁명밖에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1910년대 독실한 기독교 민족주의자였던 계봉우가 3?1운동이후 해외로 망명하여 사회주의를 정치적 이념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한인사회당 입당 후 계봉우는 당 기관지인 『자유종』의 주필로 활약하였다. 1920년 9월초 한인사회당이 한인공산당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당에의해서 계봉우는 김립과 함께 러시아로 파견되었다.계봉우는 1920년 12월 2일 치타에서 박애, 장도정, 김진, 박창은과 함께5두제로 된 한인부(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원동부 산하)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계봉우는 3인으로 구성되는 한인부 간부회 위원에 선출됨과 동시에 선전선동출판부장에 선임되어 1921년 2월부터 기관지 『노동신문』을발행하였다. 그러나 국제공산당(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미야츠키를 배경으로 하는 이르쿠츠크파의 탄압을 받게 되어, 계봉우는 박애, 장도정, 김진 등 한인부 간부들과 함께 1921년 5월 9일 원동공화국 총사령부에 체포되어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다. 이후 5월 22일 이르쿠츠크파 이성, 김철훈, 채성룡으로 구성된 재판부가 내린 판결에서 박애는 8년 징역, 계봉우,장도정, 김진은 5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이들은 소비에트러시아 제5군단과 동시베리아군대혁명법원에서 열린 제2심에서 감형을 받아 박애 5년 징역, 계봉우, 장도정, 김진은 3년 징역을 선고받았다.계봉우 등이 석방된 것은 1921년 12월인데 이는 이동휘 등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표단이 1921년 가을 모스크바에서 전개한 외교활동 덕분이었다.계봉우는 1922년 10월에 개최된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에 북간도 연길현 대표로서 참석하여 상해파의 간부로서 활동하였다. 이 대회에서 계봉우는 새로이 선출된 ‘통합고려공산당’의 중앙간부 10명의 하나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대회는 제3국제공산당(코민테른)이 통합대회로서 승인하지 않았다.시베리아내전이 종결된 1922년 말 이후 계봉우는 러시아연해주에 머물면서 국내와 만주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던 공산주의운동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 그리하여 1937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강제이주되기까지계봉우는 교육, 집필 그리고 반종교?무신자운동을 통한 한인사회의 사회주의적 건설과정에 참여하였다. 계봉우의 활발한 집필활동은 그가 원동에서 『선봉』 그리고 카자흐스탄에서 『레닌의 긔치』에 게재된 그의 기고문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머리말에서 언급하였듯이, 1936년 1월 28일에 계봉우가 작성한 「리력서」에서 주목되는 것은 ‘교육사업’이나 ‘저작사업’의 경우 1935년까지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민족혁명사업’의 경우에는 1920년 삼월에 베르흐네우진스크로 들어간 사실까지만 기록하였다. 그 이후 시기에 계봉우의활동이 교육과 문화저술 활동에 치중한 것도 사실이나 1920년 말 이후1922년 말까지 그가 보여주었던 활발한 혁명활동에 비하면 의외라 할 것이다. 1921년~22년의 기간에 그리고 그 이후 얼마 동안 치열했던 동족상잔의 파쟁에 대한 회한과 환멸에서 비롯된 바 적지 않을 것이다. 그가1920년대 전반과 중반 공산주의운동에 관한 일본첩보기록에서도 그의 이름이 적지 않게 나오는 것으로 보면 그가 조선공산주의 운동에 완전히 손을 뗀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활동의 무게중심이 교육, 언어, 민속, 종교 등의 여러 분야에서 소비에트러시아 한인사회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활동으로 옮겨진 것만은 확실하다.계봉우가 「리력서」를 남긴 1936년 1월 28일의 시점에 주목해 보자. 이때를 전후로 한 시기에 상해파의 핵심인물이었던 김아파나시(1936년 1월24일 피체), 김미하일, 이문현(李文鉉, 1935년 11월 18일 피체), 최태열(崔泰烈, 1935년 11월 4일 피체), 홍파(이민환, 1936년 1월 21일 피체), 박일리야(1936년 1월 21일 피체), 이인섭(李仁燮, 1936년 3월 20일 피체) 등이 체포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계봉우는 자신에게 스탈린대탄압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닥쳐올 것이라고 예상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스탈란대탄압의 광풍으로부터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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