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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저널정보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 한국학연구 제18호
발행연도
2008.5
수록면
65 - 91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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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불교사는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자주적인 발전을 지향하였으나 나라가 망한 이후 식민지 권력의 통제와 간섭으로 또 다시 시련과 좌절로 점철된 역사이다. 개항과 더불어 일본 물교 세력의 상륙으로 시작된 우리 근대 불교사는 일본 불교의 세력 확장에 대응하면서 나름대로 자주적인 발전을 지향하였지만 그 행보는 더디고 지루하였다. 그 원인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억불정책으로 일반 대중 승려들이 교육 받지 못한 것이 하나의 큰 요인이었다. 일본 불교 세력의 침투는 정치적인 변화가 있을 때마다 조직적이고 단계적으로 강도가 높아져 갔지만 불교계는 속수무책으로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일본 불교 세력은 막부정권이 무너지고 천황제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끝까지 막부정권을 후원하였다. 그런 까닭에 천황제가 확립되자 위기 의식을 느낀 불교계는 자구책으로 충성을 약속하면서 조선을 비롯해서, 사할린 등지의 해외 식민지 포교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계가 조선에 포교사를 파견한 것은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일본 불교 세력의 세력 확장에 직면한 조선불교계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주체적인 면모를 과시하기에는 너무도 세력이 미약하였다. 그런 까닭에 초기에는 일본 불교의 교육체제와 포교방법을 모방하여 면모를 일신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원흥사의 창건과 불교연구회의 설립으로 나타났으며 명진학교의 설립으로 구체화되었다. 명진학교의 설립 목적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포교사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근대 사회에 들어 불교계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은 교계의 대표 52명이 1908년 원흥사에 모여 최초의 종단인 원종을 설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교계의 대표들은 원종종무원을 설립하고 해인사의 이회광을 종정으로 추대하고 조직을 정비하고, 의연금을 모아 각황사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종정이었던 이회광은 원종의 정부 승인을 받는 문제로 고심하다가 일본의 포교방법을 배운다는 미명 아래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성사시켰다. 이러한 상황이 불교계에 알려지자 민족진영의 승려들은 이회광을 매종행위자로 규탄하고, 연합맹약의 무효를 선언하면서 임제종을 설립하여 정통성을 전명하였다. 임제종은 호남과 영남 지역을 거점으로 불교계의 자주성을 회복하려 하였고, 원종은 북쪽인 중앙에서 명맥을 유지하여 모처럼 성립된 종단은 양분되는 사태를 맞았다. 결국 두 종단은 나라가 망한 1912년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의하여 원종은 ‘30본산주지회의원’으로 변경되었고, 임제종은 해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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