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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관식 (한성대학교)
저널정보
미술사학연구회 미술사학보 미술사학보 제39호
발행연도
2012.12
수록면
164 - 260 (9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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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풍속도첩≫은 조선후기 풍속화의 시각적 계보를 자세히 비교 분석해 볼 때, 그리고 재질과 형식 등의 여러 가지 특징을 다각도로 고찰해 볼 때, 결코 단원 김홍도의 친필 진적으로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단원 김홍도와 긍재 김득신 이후 세대인 19세기 전반의 도화서 화원들이 단원과 긍재 같은 조선후기 풍속화 명가들의 풍속화가 역사화되고 전범화된 단계에서 이를 다양하게 모사하고 집록해 놓은 교본용(敎本用) 화보(畵譜)를 만들기 위한 화고(畵稿)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된다.특히 〈서당〉에서 앞 사람의 팔과 뒷사람의 다리를 잘못 혼동하여 중간에서 하나로 합체되게 잘못 그린 것이나, 〈씨름〉과 〈무동〉에서 구경꾼과 악사의 왼손과 오른손을 바꾸어 그리고 손등과 손가락을 뒤집어 그리는 실수를 한 것은 단원의 확실한 진적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고 모본(摹本)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더욱 그와 같이 판단된다. 도상과 필치가 단원풍과 긍재풍은 물론 이 두 범주에 포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가지 다양한 양상과 편차를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이도 여러 가지 지질과 규격의 종이가 사용된 점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또한 〈나룻배〉처럼 여러 차례에 걸친 극심한 수정 흔적을 남기며 완성한 그림을 그대로 수록하고, 거의 대부분의 그림에 4각형의 테두리 선(四周單邊 匡郭)을 그려놓고 심지어 발가락이 잘리고 팔이 잘릴 정도로 무리를 해서라도 철저하게 이 테두리 안에만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은 판각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화보를 위한 화고였음을 강하게 시사해준다. 그러나 화첩 전체에 걸쳐 그림 안에 먹물을 흘리고 먹선이 그어지고 물감이 묻고 종이가 찢기고 밀리는 등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극심한 오손(汚損) 흔적이 많은 것으로 볼 때, 판각까지는 이루어지지 않고 이 화고를 그대로 직접 교본용 화보로 오래 동안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이 ≪단원풍속도첩≫은 설사 단원의 친필 진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미술사적 의미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 도화서에서 정조-순조대의 궁중화원들이 제작했던 최상급의 풍속화를 역사적, 예술적 전범으로 삼고 이를 계승하고 재창조하기 위해 교본을 제작한 뒤, 이를 오래 동안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에 이런 사실만으로도 조선후기 회화 문화와 풍속화 전통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어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조선후기 도화서 화원들이 이룩해 낸 풍속화는, 특히 이 ≪단원풍속도첩≫에 담긴 풍속화들은 오래 동안 중국과 조선은 물론 국왕과 문인사대부, 도화서 화원, 시정인 같은 여러 사람들이 상호 교류하고 전승해가면서 상호 개입하고 수정해나가는 중층적인 과정 속에서 공동으로 형성해 나간 측면이 많기 때문에 더욱 그와 같이 이해하고 우리 나름의 새로운 예술 개념, 또는 풍속화 개념을 수립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그런 점에서 이 풍속화첩은 김홍도가 가장 창의적으로 주도하고 고양시킨 풍속화를 모태로 하여 성립된 것이 거의 분명하다는 점에서 볼 때, “전(傳) 김홍도 필, ≪단원풍속도첩≫”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김홍도의 친필 진적이 아니라 후대의 집단적 모본이 거의 확실하다는 점에서 볼 때, 우리 전통 국악의 창작과 전승 및 재창조 개념이 혼합된 “제(制)”나 “류(流)”의 개념을 차용하여 “김홍도 제, ≪단원풍속도첩≫”이나 “김홍도 류, ≪단원풍속도첩≫”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설사 어느 경우로 부르더라도, 이 풍속화첩은 조선후기 진경시대 풍속화의 전통을 가장 풍부하게 엿볼 수 있는 사료이기 때문에 미술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매우 소중한 민족사적 보물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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