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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조정은 (경희대학교)
저널정보
의료역사연구회 의료사회사연구 의료사회사연구 제11권
발행연도
2023.4
수록면
63 - 89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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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1938-1939년 상하이에서 두창 대유행에 맞서 우두 접종을 확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상하이에서 우두는 다양한 전략을 이용하여 보편 접종으로의 길로 나아갔다. 처음 우두법을 소개할 때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중의학의 이론을 이용했고, 이와 함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우두법의 효과와 안전성을 홍보했다. 조계의 위생기구와 중국인 엘리트는 무료 우두 접종의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이 시기 우두 접종은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접종소에 와서 접종을 받는 방식이었고, 강제로 시행되는 일은 없었다. 1932-1937년 두창 사망자 수는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기는 했지만, 위와 같은 노력 덕분인지 그리 위협적인 숫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두창 환자와 사망자 수는 크게 늘었다. 전쟁의 포화를 피해 조계로 들어온 난민 중 두창 환자가 있었고, 이들로부터 두창이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일본인과 일본군의 건강, 본국(즉 일본)의 안전을 목표로 삼아, 강제적 우두 접종을 실시했다. 전쟁과 식민지 침탈의 정당성은 차치하고 보편 접종의 확대라는 목표만 보면, 일본 측의 역할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통계상의 숫자로만 봤을 때 일본 측 위생기구가 실시한 백신 접종 수가 꽤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군대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강제적 접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조계의 위생기구와 병원, 진료소, 자선단체 등 다양한 기관들이 두창 방역이라는 같은 목표하에 힘을 모았다는 점이다. 인종과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 감염병의 특성은 상하이에 기묘한 상호협력관계를 만들어냈다. 두창이 몇 달 만에 종식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협력 덕분이었다. 우두 접종의 확대가 지닌 의의는 우두 접종의 기반과 방식이 콜레라 방역에 그대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통치 권력의 적극적 강제 접종”, “전통적 자선사업의 형식을 빌린 무료접종”이라는 두 가지 방식은 우두에서 시작되어 콜레라 백신의 확대에도 그대로 응용되었다. 보편화를 위한 길 또한 우두가 먼저 걷기 시작했다. 콜레라 백신은 중국인에게 친숙하지 않은 주사 형태였고, 효과도 불분명했다. 사람들은 일본이 독을 주사한다고 의심하여 콜레라 백신 접종을 꺼렸다. 접종증명서가 없으면 이동을 못하게 하자, 증명서를 몰래 위조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우두 접종은 이미 중국에 들어온 지 백여 년이 흐른 상황이었다. 상하이 사람들은 우두의 효과를 잘 알고 있었고, 무료 우두 접종에도 익숙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콜레라 백신 접종과 비교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고, 우두 접종의 보편화라는 목적을 성취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1939년 이후로도 두창은 계속 유행했고, 여전히 접종을 꺼리는 사람도 많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이전의 조계 당국이나 일본 점령군과 마찬가지로 평온한 통치를 위해 건국 초기부터 우두 접종에 힘을 쏟아야 했다. 우두의 보편화를 위한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정치,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다각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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