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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우진 (상명대학교(천안캠퍼스) 한중문화정보연구소)
저널정보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문화역사지리 문화역사지리 제35권 제1호
발행연도
2023.4
수록면
69 - 98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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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로부터 기우를 담당하는 신격은 용신이었다. 전국시대에 용은 오행설에 따라 성립된 오제(五帝), 오령(五 靈) 신관의 영향으로 5위(位)의 용신으로 숭배되었다. 당대에는 민간의 용 제사를 공인하여 정사(正祀)에 편입시키는한편 왕호를 내려 봉작하였다. 국가는 그러한 용신앙의 전형을 마을신앙에 보급함으로써 지역민을 결속하고 향촌 질서를 통제하고자 했는데, 이는 각지에서 성행한 다양한 형태의 용신앙이 ‘오룡신’이라는 통일된 신격으로 조정되어간 이유이다. 송대의 오룡제사는 사전상 지위가 강화되어 소사에서 중사로 상향되었고 항해 안전을 가호하는 신으로광범위하게 받들어진다. 그런데 남송 때에는 마조신이 용신을 능가하는 해신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고려시대 오룡묘의 신당 구성에 영향을 미친 요인으로 파악된다. 지금 선유도 오룡묘 윗당에는 왕비가 될 운명이었으나평범한 집에 시집가게 되어 오룡묘에서 죽었다는 임씨할머니의 설화가 전해온다. 이 신격은 중국에서 오룡신앙이 둔화되고 마조가 그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한 북송 말 남송 초 이후 군산도에 유입된 해신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군산도는 13세기 이후 몽고의 침략, 왜구의 약탈, 임진왜란을 겪으며 공도로 방치되어 있었으며, 조선 후기가 돼서야 고군산 지역에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서 기존 오룡묘도 다시금 운영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 민간에서 숭배되고 국가적차원에서 거듭 봉작된 오룡신은 토착화되었고, 마조묘도 단순히 ‘林氏’와 ‘妃’라는 단편적 기억에 의해 왕비가 될 운명이었던 임씨할머니로 전화되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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