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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상현 (한국외국어대학교)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90호
발행연도
2023.5
수록면
47 - 78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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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박정희 정권이 1966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민족반공연맹 제12차 회에서 세계반공연맹을 창설하고자 시도하는 과정을 검토했다. 박정희 정권이 1965년까지 계획에 없었던 세계반공연맹 창설을 1966년부터 시도한 이유와 과정을 우선 살펴본 다음, 1966년 제12차 회의에서 박정희 정권의 구상이 실패한 원인과 이후의 대응에 대해 검토했다. 당시 한국반공연맹을 소관하고 있던 문화공보부가 창설 과정을 주관했으므로 문화공보부 관련 기록물과 당시 신문 기사, 한국반공연맹이 생성한 자료를 토대로 살펴보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대통령 선거 등 정치적 이슈를 앞두고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을 활용하여 반공 공보 성과를 만들고 선전했다. 1962년에는 민정이양을 앞두고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의 자유센터 설치를 유치했고 1966년에는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을 발전적 해체한 뒤 세계반공연맹을 창설하고자 시도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와 같은 반공 공보 활동을 통해 한국반공연맹과 박정희 정권이 국내외 반공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1966년 제12차 회의를 통한 세계반공연맹 창설 시도는 박정희 정권의 구상대로 달성되지 못했다. 본래 제12차 회의는 1965년까지 박정희 정권의 국정 계획에 없었으나 기존 개최국인 태국의 사정상 취소되면서 서울에서 열리게 되었다. 문화공보부는 1966년 추가 경정 예산 신청을 통해 회의 개최를 준비했다. 국내외 많은 반공 인사를 초대하며 성대하게 회의를 개최했고, 세계반공연맹 창설을 성공시키기 위해 한국반공연맹 이사장도 교체했다. 박정희 정권은 제12차 회의 안건에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의 발전적 해체 뒤 세계반공연맹 창설 등을 포함시켰다. 하지만 각국의 이해관계와 아시아민족반공연맹 운영의 근본적인 문제로 인해 박정희 정권의 구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대만 측의 요구에 따라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은 해체되지 않고 세계반공연맹과 공존하고 창설 논의 또한 1967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 이후인 5월 8일에 집행위원회에서 논의하기로 결정했다. 세계반공연맹 창립총회는 1967년 9월 대만에서 열리게 되었다. 한국은 반공 공보 성과 확보를 위해 1970년까지 3년간 운영비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상설사무국을 서울에 유치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박정희 정권의 세계반공연맹 창설 시도는 실패가 예견되어 있었다.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이 1954년 창설 때부터 해결하지 못한 회원국의 각국 내 지위 문제는 결국 재정적 문제와 회원국 간의 참여 불균형을 발생시켰다. 박정희 정권은 제12차 회의 때 해결 방안을 의제로 선정했지만 회원국들의 반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국가단체 규모로 참여하는 한국과 대만 이외 회원국들의 저조한 참여는 세계반공연맹에서도 이어졌으며 기존의 문제들은 개선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는 아시아민족반공연맹과 세계반공연맹이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범국제적인 단체로 성장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1966년 세계반공연맹 창설 시도 실패 등 국외 반공 공보 성과의 한계는 박정희 정권이 1970년대부터 국내 반공 공보 활동에 더 치중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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