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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미경 (한국항공대학교)
저널정보
민족어문학회 어문논집 어문논집 제97호
발행연도
2023.4
수록면
5 - 38 (34page)
DOI
http://dx.doi.org/10.33335/KLL.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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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한국 공연예술사에 창극이라는 새로운 양식이 등장했다. 창극의 등장은 첫째, 등장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과거 또는 ‘전통’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둘째, 처음부터 ‘창극’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 않았다는 특수한 사정을 지닌다. 본 논문에서는 이 ‘창극’이라는 용어의 정체성과 관련해, ‘창극(唱劇)’에 선행하였던 ‘창극조(唱劇調)’, 그리고 그 앞에 존재했던 이기세의 ‘창극조(倡劇調)’에 주목해 보았다. 이기세가 주창한 ‘창극조(倡劇調)’의 ‘창(倡)’은 광대를 뜻하는 말이다. 1900년대 협률사의 초기 창극 양식 형성에 기여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일등 창부 김창환과 그의 후배급인 강용환, 염덕준 등은 ‘창우’ 집단의 후예이자, 당대까지 ‘창우’라고 불렸던 인물이다. 특히 창극 <춘향전>과 <은세계> 창작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강용환은 무안 지역의 세습무계 집안에서 태어난, 역시 재인청 출신의 명창이었다. 재인청의 연희 종목이었던 우희 또는 유희의 유풍(遺風)은 판소리 더늠 및 연행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창극으로 확장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무대에 올렸던 <개량 춘향가> 즉 창극 <춘향전>은 골계와 재담이 강화된 희극적인 공연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재담을 가미하여 대중성과 희극성을 부각하는 것은 강용환의 창극 구성에 나타나는 주요한 특징이다. 이로부터 초기 창극이 ‘창우(倡優)’ 레퍼토리로서의 창극(倡劇)에 가까운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1900년대를 전후한 시기, 한국과 중국, 일본 세 나라에는 자국의 전통연희를 개량의 대상으로 인식해 그 내용과 형식을 바꾸어보려는 ‘근대적’ 시도가 있었다. 물론 창극 양식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재인청 주요 연희 종목으로서의 우희나 유희도 기본적으로 당대성 내지 시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수년 간 <춘향가>, <심청가> 등 전래의 판소리 서사에 기반한 창극을 공연해왔던 이들이 동시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은세계>를 통해 갑작스럽게 레퍼토리 전환을 시도한 데에는 어떤 외부적 영향이 있었을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중국의 ‘창희(唱戱)’ 가운데 19세기 말에서 1910년을 전후한 시기까지 유행했던 ‘시장신희(時裝新戱)’가 창극 <은세계>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그 정황을 탐색해 보았다. 우선 레퍼토리에 대한 새로운 개혁에의 요구는 1900년대 초기 창극도 맞닥뜨린 것이었으며, 작품이 정부 부패를 묘사하고 민심을 일으키는 기능을 한 부분이나 창의 비중이 축소․변경된 부분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중국 화극에 나타난 ‘막표제 연극’의 실상을 창극 <은세계>의 형성에 대입해 볼 때, 강용환을 비롯한 창우들의 역할은 배역에 따라 연기와 대사를 하는 배우를 넘어서는 공동 창작자로 다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또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경성구파배우조합의 레퍼토리 가운데 중국 창희 또는 희곡의 영향을 받은 창극 및 기존 판소리 열두 바탕의 서사를 벗어난 새로운 창극이 상대적으로 자주 공연되었다는 사실도, 초기 창극이 ‘무엇을’ 또는 ‘어떻게’ 공연하는가에 관심을 두면서 그 무게 중심을 판소리에 두었던 ‘창극(唱劇)’보다 ‘누가’ 공연하는가에 관심을 두면서 그 무게 중심을 창우에 두었던 ‘창극(倡劇)’에 근접해 있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그러나 박월정의 창극 <단종애곡>에 대한 이동백의 반응에서 볼 수 있듯, 1930년대는 이미 창우[倡]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공동 창작의 방식으로 한 편의 새로운 창극을 만들어내는 일보다, 판소리 음악으로서의 ‘창(唱)’에 대한 관심이 훨씬 커진 시기였다. 1930년대 조선성악연구회의 활동과 함께, 창극의 정체성은 판소리다운 창(唱)으로 기울었고 그것이 점차 양식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창극은 창극(唱劇)일 뿐 더 이상 창극(倡劇)이 아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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