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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허형욱 (국립중앙박물관)
저널정보
한국미술사교육학회 미술사학 美術史學 第46號
발행연도
2023.8
수록면
39 - 66 (28page)
DOI
10.14769/jkaahe.2023.08.4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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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918~1392)는 국가적으로 불교를 숭상하여 수도 개경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불교문화가 다채롭게 전개되었고, 약사신앙이 광범위하게 확산됨에 따라 약사여래상도 전국에서 활발히 조성 되었다. 본고에서는 불교조각에서 통일신라 도상의 전통이 계승되면서 변화가 진행되었던 12세기 무렵까지를 편의상 고려시대 불교조각사의 전기(전반기)로 설정하고, 이 시기 약사여래상의 계보와 특징을 살펴보았다.
문헌기록을 보면 고려 전기의 약사신앙은 藥師道場으로 대표되는 실천적인 신앙이 유행한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의 약사도량은 광종(재위 949~975) 때의 개경 불은사처럼 상설화된 공간적 개념과, 예종(재위 1105~1122) 대에 궁궐에서 베풀어졌던 호국적인 불교의례와 같은 두 가지 형태를 띠었다. 또한 ‘약사’가 들어간 이름의 사찰이 전국 각지에 건립되었고, 선종 계통을 포함하여 여러 사찰에서 약사여래상이 주존으로 모셔졌다.
고려 전기의 약사여래상은 통일신라와 달리 소형의 금동불이 많지 않고 중․대형의 석불과 마애불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이 상들은 통일신라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손의 자세나 좌법, 착의방식등 세부형식에서는 변형이 가해졌다. 특히 좌상 중에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올려 손가락을 맞댄 수인의 도상은 통일신라 때 주로 四面佛像 부조의 하나로 제작되었던 데 비해, 고려 전기에는 이도상이 독립하여 단독의 환조상으로도 만들어졌다. 이와 같은 약사여래좌상 제작방식의 다변화는 이 시기 불교조각의 지역적인 다원화 현상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고려 전기에는 통일신라에 없었던 새로운 형식의 약사여래상이 등장하였다. 경북 김천 금릉 신안동 석조여래입상이나 전북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 광배 뒷면의 선각여래입상은 여래상임에도 한 손에 淨甁을 쥐고 있는 이례적인 도상으로서 주목된다. 정병을 지닌 여래상의 가장 이른예는 唐 8세기의 금동불에서 확인되며, 이 상들은 지물로 약기를 함께 들고 있어서 존명이 약사여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특이한 도상의 경전적 근거는 약사여래 주문[다라니]을 가한 물을 마시면 병고가 없애진다는 義淨 역(707년) 『약사유리광여래칠불본원공덕경(칠불약사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 후 정병을 든 약사여래상의 도상은 발해나 거란[遼] 등 북방 지역을 거쳐 고려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고려 전기의 약사여래상은 통일신라 약사여래상의 형식을 바탕으로 변용이 이루어지는 한편, 전에 보이지 않던 도상적 요소가 추가되면서 점차 새로운 특징을 갖추어 나갔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에 이어서 사면불상의 하나로 약사여래상이 조성되었다. 사면불상의 약사여래상은 당시 불교신자들이 지녔던 세계관과 함께 약사여래의 의미와 상징성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므로 추후 별도로 고찰하고자 한다.

목차

I. 머리말
Ⅱ. 문헌기록에 보이는 고려 전기의 약사신앙
Ⅲ. 통일신라 도상의 계승과 변용
Ⅳ. 淨甁을 지닌 약사여래상의 제작
Ⅴ.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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