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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선유정 (경남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과학기술학회 과학기술학연구 科學技術學硏究 第23卷 第1號 (通卷 第50號)
발행연도
2023.3
수록면
141 - 164 (24page)
DOI
10.22989/jsts.2023.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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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인공강우 실험은 1930년대 시도된 기록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62년 부터였다. 1961년 미국에서 기상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국채표는 인공강우가 한국에서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내용이 언론을 통해 이제 막 정권을 수립한 박정희에게 알려지면서, 인공강우는 정부의 주목을 받게 됐다. 이후 국채표는 중앙관상대의 대장으로 부임했고, 1962년 관상대를 방문한 박정희는 국채표를 만난 후 ‘인공강우’를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토록 지시했다. 국채표는 1965년을 ‘인공강우 완성의 해’로 목표로 하고, 인공강우는 관상대의 대표 업무가 되었다.
인공강우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때마침 한국에 가뭄이 심해지면서 더욱 커졌다. 정부는 가뭄 대책의 일환으로 인공강우를 생각하여 관상대에 많은 연구비를 지급했다. 연구비를 받은 국채표는 시험 장비와 연구 자문을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하지만 그가 일본에 갔을 때는 인공강우에 대한 일본 내부의 비판이 커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별 성과 없이 돌아온 국채표는 더 이상 인공강우를 대외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고, 1967년 조용히 정년퇴임 했다.
국채표의 퇴임 후 양인기가 관상대장으로 부임했다. 사실 국채표는 ‘태풍 예보’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던 반면, 양인기는 인공강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럼에도 양인기는 국채표의 실패를 거울삼아 인공강우를 강조하지 않았다. 그는 인공강우 대신 ‘인공증우’를 내세우며 인공강우보다 연구비가 적게 들고 실효성이 높다는 것 정도만 알리며 정부의 지원을 요청하지 않고 인공강우 연구를 조심스럽게 이어갔다. 그 결과 소란스러웠던 국채표의 인공강우 노력은 역사에서 잊혀졌고, 양인기는 한국 최초로 인공강우를 시도한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목차

1. 머리말
2. 국채표의 등장과 인공강우
3. 정치화된 인공강우
4. 난관에 부딪힌 인공강우
5.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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