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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수미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45호
발행연도
2012.2
수록면
31 - 64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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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당 고종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마저도 병합시키려 하였다. 이 시기 당의 대외팽창정책은 절정에 이르렀고, 웅진도독부는 당의 대외정책을 수행하는 전진기지로 기능하였다. 672년 신라에 의해 백제 지역에서 축출된 웅진도독부는 676년 요동의 건안성으로 옮겨졌다. 이때 당은 북방의 토번?돌궐 등과의 전쟁으로 신라를 견제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웅진도독부를 요동으로 옮긴 배경은 7세기 후반 북방 이민족들과 힘겨루기를 하는 당이 요동 지역을 방어하고, 신라를 견제하고자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결국북방 이민족들의 움직임과 신라의 끈질긴 항쟁은 웅진도독부를 요동으로 옮기는 결과를 불러왔던 것이다.677년 2월 부여융은 웅진도독으로, 보장왕은 요동도독으로 부임하였고, 이와 동시에 安東都護府는 新城으로 옮겨졌다. 요동의 웅진도독부에 부임한 부여융은 679년에서 681년에 있었던 보장왕?토번?돌궐?말갈?신라 등이 대당 무력항쟁을 도모한 모반 사건에 함께 가담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건안성의 웅진도독부는 전통적으로 고구려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 특히 당 조정의 무관심으로 부여융이 의지할 곳은 고구려 세력뿐이었다. 그리하여 681년 모반 사건이사전에 발각되어 보장왕이 유배되자, 부여융도 함께 유배되었다가 그 다음해보장왕과 함께 사망하였다. 즉 웅진도독부는 681년 보장왕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폐치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웅진도독부의 이동과 폐치는 7세기당의 대외정책 및 국제 정세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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