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에 대한 셸러 논변의 연구를 통해서 실용주의가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지식론을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오를 찾을 수 있다. 비록 실용주의자들이 자신의 지식론을 보편화하려 하지만, 셸러는 그의 논변을 통해서 퍼어스(C. S. Peirce), 제임즈(W. James), 쉴러(F. C. S. Schiller) 등의 지식론을 자연과학 분야의 지식과 인식에만 타당하고 그러므로 결코 보편화될 수 없는 이론임을 밝히고 있다. 예를 들면 도덕적 행위와 관련한 인격의 도덕적 성향은 그 행위와 그 행위 유용성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용주의는 명제의 의미를 실천 결과와 동일화 하여 어떤 명제의 참(眞)은 그 명제의 유용한 결과일 뿐이라 생각한다.
자연과학적 지식 이외 교양적 본질 지식이나 형이상학적 구제 지식은 자연과학 지식처럼 세상을 지배?성취하려는 실천적 동기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 지식들은 모든 지각을 관통해서 자명하게 남으나 실천적 목적이나 동기에 의해서 얻어지지 않기 때문에, 유용성의 진?위 척도를 통과하지 못한다. 실로 우리는 실천적 목적이나 동기가 아니라 순수 예지적 또는 관조적 동기로 얻어지는 지식이 있고, 유용한 결과를 가질 수 있는 가치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것들이 덜 사용되고 덜 유용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실용주의가 지배?성취의 지식과 또한 유용한 결과를 가질 수 있는 가치의 지식만 허용함으로써 지식 자체의 본질을 오해하고 지식의 범주를 축소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각활동에서 생명층의 역할을 주목한 셸러가 생명의 활력 중추에서 발하는 충동?충박이 감각적 지각의 발생 조건이 되며, 이 충동?충박이 감각적 지각을 촉발하게 하고 그것을 이끌어주며, 감각적 지각을 통해서 얻어진 명제의 참을 결정하도록 하는 요소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감각적 지각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자연과학적 지식이 실용주의 지식론에서 정당화된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형식적 기계론적 자연법칙에 대한 신념이 연역적 토대도 귀납적 토대도 가지지 않고, 객관적 시?공간 내의 측정할 수 있는 결과의 경험을 위한 조건도 아니라는 실용주의 사고가 옳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실용주의가 타당성이 오직 활력적 충박?충동에 상대적인 자연법칙을 엄중히 인정하는 기계론적 상대주의 관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논변에서 옹호하기도 한다.
실용주의에 대한 셸러 논변의 연구를 통해서 실용주의가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지식론을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오를 찾을 수 있다. 비록 실용주의자들이 자신의 지식론을 보편화하려 하지만, 셸러는 그의 논변을 통해서 퍼어스(C. S. Peirce), 제임즈(W. James), 쉴러(F. C. S. Schiller) 등의 지식론을 자연과학 분야의 지식과 인식에만 타당하고 그러므로 결코 보편화될 수 없는 이론임을 밝히고 있다. 예를 들면 도덕적 행위와 관련한 인격의 도덕적 성향은 그 행위와 그 행위 유용성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용주의는 명제 의미를 실천적 결과와 동일해서 어떤 명제의 참(眞)은 그 명제의 유용한 결과일 뿐이라 생각한다.
자연과학적 지식 이외 교양적 본질 지식이나 형이상학적 구제 지식은 자연과학 지식처럼 세상을 지배?성취하려는 실천적 동기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 지식들은 모든 지각을 관통해서 자명하게 남으나 실천적 목적이나 동기에 의해서 얻어지지 않기 때문에, 유용성의 진?위 척도를 통과하지 못한다. 실로 우리는 실천적 목적이나 동기가 아니라 순수 예지적 또는 관조적 동기로 얻어지는 지식이 있고, 유용한 결과를 가질 수 있는 가치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것들이 덜 사용되고 덜 유용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실용주의가 지배?성취의 지식과 또한 유용한 결과를 가질 수 있는 가치의 지식만 허용함으로써 지식 자체의 본질을 오해하고 지식의 범주를 축소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각활동에서 생명층의 역할을 주목한 셸러가 생명의 활력 중추에서 발하는 충동?충박이 감각적 지각의 발생할 조건이 되며, 이 충동?충박이 감각적 지각을 촉발하게 하며 이끌어주며, 감각적 지각을 통해서 얻어진 명제의 참을 결정하도록 하는 요소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감각적 지각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자연과학적 지식은 실용주의 지식론에서 정당화된다고 하며, 그리고 실용주의가 형식적 기계론적 자연법칙에 대한 신념이 연역적 토대도 귀납적 토대도 가지지 않고, 객관적 시?공간 내의 측정할 수 있는 결과의 경험을 위한 조건도 아니라는 주장에서 옳다고 하며, 그 타당성이 활력적 충박?충동에 상대적인 바로 그 자연법칙들을 엄중히 인정하고 있는 기계론적 상대주의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논변에서 옹호하기도 한다.
When pragmatism one-sidedly takes the knowledge of natural science to be the sole base for all knowledge, Its shortcomings become an issue of error. Really pragmatism universalizes its own theory of scientific cognition. Scheler does not single out only the pragmatism of C. S. Peirce, W. James, F. C. S. Schiller and so forth as being responsible for the unscrutinized acceptance of one particular knowledge and cognition. For example, the moral tenor of character(Person) with respect to moral deeds is entirely indifferent to both such deeds and the conception of the success of their workability. But according to pragmatism, since the meaning of a proposition is identical with practical consequences, the truth of a proposition is to be nothing but its useful consequences.
Besides of the knowledge of fortuitous reality or the knowledge of natural science that with which pragmatism deals, the knowledge of essence or salvation does not change the world, as knowledge of fortuitous reality or the knowledge of natural science does. They remain evidential throughout all perceptions, and they do not come under the criteria of truth and falsity. Really we can recall that the less a value of useful consequences is, the less it becomes manageable and useful. Since pragmatism only allows knowledge of control, that is, those values that can be reckoned with and are manageable and have useful consequences, it misconceives the nature of knowledge itself and is used to reduce the category of knowledge.
Scheler holds that the condition for sensory perceptions to occur is the spontaneous drive(Drang) in a vital center of the organism. The drive?impulse are the condition for and guide of sensory perceptions, and are a component that is to determine the truth of a proposition. Therefore according to Scheler, pragmatism proves to be correct in all of this: our belief in formal mechanical laws of nature has neither a deductive nor any inductive foundation; nor is this belief a condition for experiencing the measurable sequences in objective time?space. And hence most important is the fact that the mechanical relativism of pragmatism has an ontic significance. Pragmatism is to confirm strictly laws whose validity is relative to vital Drang and practical facto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