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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규무 (광주대학교)
저널정보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숭실사학 제47호
발행연도
2021.12
수록면
147 - 174 (28page)
DOI
https://doi.org/10.16942/ssh.2021.47.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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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이 1907년 설립한 오산학교를 계승하여 1925년 승격된 오산고보는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대표한 ‘민족사학’이다. 1920년대부터 유행처럼 번진 맹휴는 오산고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모두 10회의 사례가 확인된다. 이는 단일 학교로는 최다 또는 상위권에 해당된다. 1926~1931년에는 맹휴가 매년 일어났으며, 1931년에는 3회로 정점을 찍었다. 맹휴의 원인은 교원에 대한 불만이 가장 많았으며, 1920년 맹휴의 요구조건이었을 것을 짐작되는 조선인 교사에 대한 배척은 전국적으로도 최초의 사례가 아닐까 여겨진다. 조선인 교원을 배척하는 맹휴가 전체 맹휴의 절반인 5회였다는 점은 학교 내부의 갈등이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승훈의 사위가 교장대리를 맡으면서부터 맹휴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그리고 학교측은 대부분맹휴에서 학생들을 퇴학시키며 강경하게 맞섰으며, 학생이 교사를 구타하는 상황도 2회 연출되어투쟁 수위가 높았음을 짐작케 한다. 1929년 3월과 1931년 1월의 맹휴는 각각 3·1운동 및 광주학생운동과 연관된 것으로 민족적인성격을 띠지만 나머지 맹휴는 대부분 민족문제와 무관했다. 1931년 맹휴에서는 “사회과학 연구” 와 “노예교육 반대”라는 구호가 나와 사회주의의 영향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교내경관打合 반대” 요구는 학교측에 대한 학생들의 불신 정도를 보여준다.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오산고보이지만 맹휴의 과정과 결과를 놓고 보면 ‘민족사학’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1932년 이후 오산고보의 맹휴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 1931년을 정점으로 하여 맹휴가 급감하는 것은 전국적 현상이었다. 둘째, 매년 반복되는 맹휴와 처벌 때문에 맹휴를 주도할만한 학생 지도부가 와해되었을 것이다. 셋째, 정주의 사회단체·청년단체는 유명무실해져서 학생들을 지도할 만한 역량이 없었다. 넷째, 1934년 오산고보의 화재 때문에 복구가 시급했으므로 맹휴을 일으킬 만한 명분이 없었다. 다섯째, 정주에서의 맹휴는 대부분 오산고보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경찰의 감시·탄압이 집중되었다. 오산고보 맹휴가 사회주의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는지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교내에 독서회와같은 비밀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타지에서 사회주의를 수용한 정주 출신유학생들이 오산고보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은 열려 있다. 1931년 마지막 맹휴 직후 경찰에서 학생·청년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여 사회주의와의 연관성을 조사한 점도 이를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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