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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세욱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영남학 영남학 제40호
발행연도
2007.1
수록면
253 - 288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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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가란 용어가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하며 주목을 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그러나 明末淸初 혼란한 역사 속에서 객가의 대표 문인 위제서와 양파 정태화의 만남을 통하여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비록 이들의 시기에 객가라는 용어는 서로에게 인식되지는 않았지만 객가인의 정신문화를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였음에 틀림없다. 청나라가 吳三桂와 桂王을 운남에서 죽이고 공식적으로 명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이를 축하하러 사신으로 간 양파 정태화는 돌아오는 길에 江西 寧都사람 魏際瑞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은 집안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청 조정에 출사한 明나라의 遺民의 모습으로, 또 한 사람은 청나라의 강압에 굴복하고 청나라의 통일에 마지못해 축하하는 사신의 모습으로의 만남은 표면적으로 매우 상반되어 있었으나 서로의 마음을 하룻밤 만에 토로하며 서로의 정표를 주고받는다. 실제로 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연결시켜준 것은 유사한 출신 배경과 崇明反淸이었다. 이외에 위제서를 비롯한 三魏의 학문적 경향에 대해서 정태화가 어떠한 이해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정태화는 그의 문집을 받아서 “중국에도 才子가 있다”는 것을 국내에 알리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정태화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내 비밀에 붙여졌다가, 100여년 뒤에야 李德懋에 의해 다시 드러나게 되고 재조명된다. 이후 이러한 만남은 朴齊家, 洪良浩, 鄭元容, 鄭東愈, 강위등과 같은 實學者들을 중심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이들의 관심은 정태화와 위제서가 가졌던 崇明反淸이라는 공감대와는 달리 三魏의 經世致用적 학문에 중심이 실려 있었다. 결과적으로 정태화와 위제서의 만남은 당시 국내에 아무런 가시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정태화는 객가 사회의 심장부에 경모의 씨앗을 심어 놓았으며, 성리학의 지루하고 복잡한 시비논쟁에서 벗어나 經世致用으로 나아갈 준비를 이미 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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