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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기현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영남학 영남학 제1권 제35호
발행연도
2004.1
수록면
139 - 177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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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노래 아리랑이 어떻게 생성되고, 생성 당시 어떤 노래로 출발하여 어떠한 변화의 과정을 겪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살피는 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아리랑’은 노래라는 의미를 지닌 토착 기층어로서 처음에는 ‘입타령이 붙은 새로운 노래’의 지칭어로 사용되다가 점차 오늘날과 같은 특정 노래 아리랑의 장르적 범칭이 되었다.‘아리랑’은 1860년대 봉건사회의 붕괴에 따라 크게 성장한 민중의식과, 당대 성행한 잡가류의 타령조 가락에 힘입어 등장한 신민요이다.‘아리랑’은 경복궁 중창기에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보다 발전한 새로운 양식의 후렴인 입타령과 교섭, 변형되어 지금과 같은 형태의 아리랑으로 전파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노래이다. 따라서 본격적인 노래 ‘아리랑’으로서의 출발기는 1860년대를 넘어갈 수 없고 이때부터 아리랑의 태동형성기로 잡는다. 태동형성기의 아리랑은 독자적인 성격을 확보하지 못한 채, 각 지역에서 불려지던 토속적인 농업노동요에 입타령(아리랑 후렴)이 붙어 새로운 노래로 불려지기 시작했으며, 권번이나 유랑노래패 등이 부르던 통속적인 잡가류의 아리랑이 공존하던 시기이다. 성창융성기는 1920년 대 말부터 1940년대까지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흥행하여 주제 음악인 아리랑이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성창되던 시기이다. 토속아리랑이 약화 또는 변모하여 통속화되기 시작하였고, 유성기판과 매스미디어의 발달, 신민요와 노래문화의 번화 융성에 따라 대중가요로서 자리잡아가던 시기이다. 이 시기 아리랑은 식민지 민중의 현실적 삶을 노래하고 다양한 목적에 따라 창작되고 변조되던 노래이다.쇠퇴침체기는 1941년 태평양 전쟁부터 해방공간, 한국전쟁을 거쳐 1970년대까지로 잡는다. 일제의 식민지 탄압정책으로 아리랑을 부를 수 없게 되고, 태평양전쟁 및 6.25전란을 통해 군가가 판을 치며, 해방공간 또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이념가요가 주류를 이루었기에 이 시기에 아리랑 또한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단지 기억되고 회상되는 소리로서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특히 해방공간에서조차 아리랑은 더 이상 민중과 해방민족의 노래로 부활하지 못하고 외래가요에 주도권을 내주고 말았다.이후 70년대 민족주의의 열풍과 주체사상의 정립에 따라, 분단된 남북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민족 통합적 이데올로기로 ‘아리랑’을 앞세우게 된다. 이후 남북한 스포츠단일팀의 국가나 응원가로, 향토애를 고양하는 애향가로, 반미전선의 정체성 상징물로 아리랑은 애국민족요로 부활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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