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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곽성연 (한국체육대학교) 하웅용 (한국체육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체육사학회 한국체육사학회지 한국체육사학회지 제19권
발행연도
2007.1
수록면
115 - 128 (1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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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체육관이 국내 최초의 실내체육관은 아니다. 한국체육관이전에도 YMCA가 있어 근대체육 대중화의 장으로써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김재우, 2005: 4). 그러나 YMCA가 사회체육 진흥사업에 총력을 다 했다면, 1966년 태릉선수촌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한국 엘리트스포츠 산실은 한국체육관(조선체육관)이었다. 이 연구는 1946년 건립추진위원회의 조직부터 1966년 태릉선수촌이 설립될 때까지의 한국체육관이 체육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조사, 연구하였으며 결과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체육관은 국내 유일의 사설 종합 실내체육관으로 한국전쟁 이전까지 엘리트스포츠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황을수가 있었다. 황을수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기 전까지 조선체육관을 성실히 운영하여, 런던 올림픽에 역도와 복싱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는데 기여했으며, 런던 올림픽 이후 한국체육(특히 격투기 종목)발전에 기여하였다. 더욱이 보다 체계적인 엘리트 선수육성을 위하여 체육대학설립을 목표로 두었다는 사실은 한국체육의 선구자로서의 자질과 현안을 알 수 있는 부분이라 사료된다. 둘째, 한국전쟁 이후 한국체육관으로 재건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며 주도적으로 엘리트스포츠를 이끌었다. 한국전쟁으로 황을수는 납북되고 조선체육관은 폐쇄되었으나, 전쟁 후 더욱 굳건한 모습으로 재건하여 한국 엘리트스포츠의 본거지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한국체육관 출신들은 건국 후 네 번에 걸친 올림픽참가사를 볼 때, 총 한국선수단의 약 18%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복싱의 송순천은 멜버른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의 올림픽 은메달을 조국에 안겼고, 도쿄올림픽의 장창선도 레슬링에서 두 번째 은메달을 획득하는 등 한국 엘리트스포츠 발전의 선두에 있었다. 셋째, 한국체육관에서 배출된 선수들은 훌륭한 지도자로서 한국체육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한국체육관은 본격적으로 레슬링, 태권도, 복싱, 유도 등 종목별 지도자 강습회 및 심판강습회를 개최함으로서 한국체육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육성하였다. 한국체육관에서 지도자 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 다수가 한국체육이 스포츠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주 원동력이 되었다. 넷째, 한국체육의 국제무대 진출에 교두보 역할을 한다. 한국체육관은 필리핀 체육회장의 초청을 받게 된다. 이러한 결과 국제무대의 경험이 부족한 국내 선수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였고, 런던 올림픽 이후 스포츠를 통한 세계제패를 목표로 하던 한국체육계에 신선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본다. 한국체육관은 광복 후 한국에 유일한 실내사설체육관으로 투기 종목의 보급과 엘리트 선수양성 및 지도자 양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또한 한국체육관은 1966년 태릉선수촌이 설립이전까지 실절적인 국가대표 훈련장소로서도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한국체육관은 무리한 사업 확장과 재정의 악화가 지속되면서 결국 1996년 최종 매각을 하였고 그 자취마저도 한국체육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본 연구는 한국체육관의 설립과 전성기로 사료되는 1966년까지의 체육사적 의의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한국체육관의 전체적인 체육사적 의의를 찾기 위해서는 1966년부터 최종 매각과정까지의 면밀한 연구가 필수적이라 사료되며, 후속 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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