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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진주 (단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 선사와 고대 제26호
발행연도
2007.1
수록면
89 - 118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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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유역에 신라토기가 처음 유입되는 시기는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한 이후이므로 6세기 중엽경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기종으로는 고배, ‘’형 개, 부가구연대부장경호 등이 있다. 이후, 인화문 토기가 확산되면서 점차 이전 시기의 기종이 사라지고 인화문이 시문되는 대부완과 ‘凸’형 개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병류가 나타나고 있다. 즉, 인화문의 등장으로 인해 기종의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종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7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하여 2기로 나누었는데, 1기는 6세기 후반~7세기 후반, 2기는 7세기 후반~10세 초로 보았다.시기별로 출토된 기종을 유적별로 살펴본 결과, 유적 또한 2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었다. 1기에 해당되는 유적은 생활유적이 대부분이며 고분유적이 다음을 차지하였다. 생활유적은 모두 산성으로 신라의 북진과 통일을 하기위해 벌인 전쟁과 관련이 있다. 또, 이 시기에 해당되는 고분유적 인근에는 산성이 위치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어 산성과 고분간의 축조집단에 대한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2기에는 생산유적, 생활유적, 고분유적이 모두 나타나고 있다. 생활유적은 할미산성을 제외하고 1기의 유적이 그대로 사용된다. 이는 경덕왕대에 지방제도가 개편되면서 규모가 큰 산성은 군현 치소의 기능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행정적 역할이 낮은 유적은 폐성되기도 한다. 또한, 주군현의 아래 자연촌이 편재되면서 토기를 만드는 전문집단이 조직되었다. 고분유적 또한 이 시기에 들어 부장유물 구성이 인화문토기로 바뀌었으며, 고분의 축조가 줄어들고 박장이 이루어진다. 이는 불교수용이후 화장이 성행하면서 사후세계 인식에도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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