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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경구 (성균관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상고사학회 한국상고사학보 한국상고사학보 제47권 제47호
발행연도
2005.1
수록면
89 - 113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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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멸망 후 검모잠, 안승, 고연무 3인에 의해 부흥운동이 주도되었다. 고연무는 평양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고연무는 당군 남침 후 황해도 지역에 남아서 끝까지 항쟁하였으나 673년 패전하고 신라로 망명하였다. 그것은 고구려군대가 신라군 아래로 편입된 것을 의미하였다. 안승은 해군이었던 듯한데 신라에 투항하여 사야도에 배치되어 있었다. 검모잠도 해군이었다. 의주로 비정되는 서해 해군 기지 궁모성에서 부흥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대동강으로 기습, 평양으로 진입하여 당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공 직후 철수하고 신라에서 안승을 초치하여 주군으로 옹립하였다. 그 후 안승과 검모잠은 서로 주도권 다툼을 벌였고 결국 672년 당군의 남침 이후 새 왕국은 급속히 쇠약해져 갔다. 이렇게 고구려 부흥군이 황해도 일원에서 활동한 까닭에 나당전쟁의 요지들이 대개 그 일대로 비정된다. 백수성은 백수산, 천성, 천산 등으로도 표기되고 있는데 황해도 재령에 있는 우두천으로 비정된다. 신라군은 그곳으로 당군을 유인하여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신라군이 대패한 곳으로 알려진 횡수 역시 황해도 서흥 서북방의 흥수원으로 비정되었다. 신라군은 장수산 남방의 한성에서 출발하였다. 그 진격로 방향은 신라군의 참전 경위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고구려 군대가 패전한 뒤 신라는 안승을 고구려왕에서 삭제하고 다시 보덕왕으로 책봉하였다. 보덕은 황해도 서방 영강 지방인데 안승은 이제 고구려를 대표하는 위치에서 황해도 서부 일대의 리더로 격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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