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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역사문화연구 역사문화연구 제36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147 - 192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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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항쟁 과정에서 그 목표와 주체들이 바뀌어가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붕괴라는 결과를 발생시켰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이 항쟁의 시작부터 주장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지역 고등학생시위로부터 시작된 학생 시위는 노골적인 부정선거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 구호와 요구사항은 구체적인 정치적 개선사항을 담지는 못했다. 특정 기관 또는 특정 책임자를 거명하며, 타도하거나 사퇴를 요구하는 구호 같은 것은 없었다. 3.15 부정선거가 자행된 이후 일부 학생과 시민들은 정부통령 선거의 재선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는 나오지 않았다. 학생과 시민의 민주항쟁 과정에서 이러한 구호가 처음 나온 것은 1960년 4월 11일 제2차 마산봉기 때부터였다. 그러나 이는 시위대 일부가 특정한 국면에서 외친 구호였지 대다수의 시위대가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외치는 구호는 아니었다. 제2차 마산봉기 이후 학생시위가 계속되었지만 이러한 시위에서도 이승만 퇴진 구호는 나오지 않았다. 반면 민주당 일부 간부들과 지방당원들은 3.15 부정선거 이후 간헐적으로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민주당이 정권타도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민주당은 기존 정치제도 안에서, 또한 합법적인 틀 안에서의 대정부 투쟁을 고수했다. 대규모 시위 및 희생자가 발생한 1960년 4월 19일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4.19 봉기의 과정에서 일부 시위대가 이승만 퇴진구호를 외쳤지만 이러한 구호는 1987년 6월항쟁 때 외쳐진 “호헌철폐”, “직선쟁취” 같이 대부분의 시위대가 공유하면서 반복적으로 외쳐지며 항쟁의 목표를 집약해주는 구호는 아니었다. 당시 학생들이 경무대로 간 것도 여러 정황을 볼 때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 그에게 항의하고 대화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경무대 앞에서 시위대에 총을 쏘았고, 대규모 유혈상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민주항쟁은 부정선거 문제보다는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정부와 집권자의 책임을 묻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4월 23일 민주당의 지도자 장면도 부통령직을 사퇴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론은 3.15 부정선거 때부터 있어왔던 것이었다. 때문에 장면의 입장 표명은 당시에는 뒤늦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4월 25일부터 민주항쟁은 정권타도 운동으로 전환되는 양상이 뚜렷해졌다. 25일 오후 마산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그 퇴진을 요구하는 할머니들의 시위가 발생하였다. 한편 같은 날 오후 서울에서는 교수단이 대통령의 퇴진 요구가 포함된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여기에 몰려든 학생과 시민들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 구호를 외쳤다. 이 날의 시위는 사실상 철야시위로 이어졌고, 26일 이른 아침부터 서울 시내에 집결한 군중들은 3.15 부정선거의 재선거, 이승만 퇴진, 경찰 책임자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4월 26일 오전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가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민주항쟁이 정권퇴진운동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승만 퇴진이라는 결과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렇게 급속한 사태전환이 발생한 이면에는 미국과 한국 군부의 작용이 있었다. 미국은 3.15 부정선거의 진행과정에서 이른바 내정불간섭을 명분으로 여기에 개입하지 않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다가 4월 11일 2차 마산봉기를 계기로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고 여기에 적극 개입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미국이 여기에 개입하게된 것은 민주항쟁이 사회혼란을 발생시키고 급진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즉 일종의 예방혁명적인 조치였다. 이에 미국정부는 4월 19일 대규모 봉기와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이승만 정부에게 타협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개입하였다. 또한 4월 25일과 26일 대규모 시위가 재발하자 한국 정부요인을 압박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실질적으로 촉구하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발동하고 군을 투입하여 시위를 막으려 했지만, 한국군은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한국군의 중립적 태도는 물론 미국의 영향력과 관련이 있다. 미국 정부와 주한미군 지도자들은 시위 진압을 위해 이승만 정부가 한국군을 동원하는 것을 승인하였지만, 군이 시민들과 직접적으로 충돌하지 않도록 거듭 당부하였다. 한국에서 군과 시민들이 직접 충돌할 경우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국군의 중립적 태도는 미국의 압력뿐만이 아니라 한국군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측면도 강했다. 유엔군 사령관이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고, 군대가 실질적으로 미국의 원조로 유지되는 상황에서 한국군은 1950년대에도 정치 권력으로부터 상당한 자율성을 누리고 있었다. 당시 한국군이 보여준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율성은 한편으로는 군이 민주항쟁을 빌미로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을 우려하게 만들었다. 당시에도 일부 지식인들이 이러한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이승만 정부의 붕괴는 기본적으로 민주항쟁 때문에 발생하였지만, 여기에 작용된 힘은 저항운동으로부터만 나오지는 않았다. 미국과 한국군 모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항쟁의 결과는 민주항쟁의 요구가 그대로 관철되어 급속한 정치적 변화를 가져오기보다는 기존 보수정치인들의 기득권이 그대로 유지되는 방향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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