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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 백제연구 제54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84 - 111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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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무령왕릉 출토 매지권(買地券)의 기원 및 수용배경에 대하여 검토한 것이다. 무령왕릉(武寧王陵)이 백제사 연구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그리고 같은 석판에 기록된 매지권 덕분이다. 특히 많은 연구자들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매지권이며, 그것은 지신들로부터 땅을 산다는 일종의 토지매매문서와도 같은 기록이다. 필자는 기왕의 여러 연구 성과를 참고하고 아울러 최근까지 진행된 중국 매지권 연구의 동향을 일차적으로 파악하였으며 그러한 토대위에서 무령왕릉 매지권이 직접적으로 중국 어느 시기의 어떠한 매지권과 관련지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와 같은 새로운 상장(喪葬)요소가 어떠한 배경 아래에서 백제 사회로 전해진 것인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중국에서 매지권이 처음 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동한(東漢)시기 말이며 이후 일정한 형식변화를 보이며 유행한다. 동한시기에 매지권이 등장한 배경으로 당시 풍미하였던 영혼불멸관(靈魂不滅觀), 사후에도 토지를 소유하고 싶다는 보편적 소망,사후세계와 관련한 도교의 유행, 그리고 금비령(禁碑令)을 들 수 있다. 특히 동한 왕조는 호사스러운 장례풍습을 규제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지상에 비석 세우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매지권이 비석을 대신하게 되었다. 주지하듯 백제 사회에서 중국풍의 상장요소인 매지권이 어느 정도 유행하였는지 알기 어렵다. 실물자료로는 무령왕릉 출토품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성시기 이래로 중국 문물이 꾸준히 수입되어 백제 지배층의 여가생활 및 상장의례에활용된 점에 주목하고 아울러 웅진시기에 무령왕릉 이외에도 송산리 6호분, 교촌리 2호분과 3호분과 같은 전축분이 축조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왕족 혹은 그에 준하는 인물들의 무덤 축조에 매지권이 일정 기간, 일정 범위에 걸쳐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할만 하다. 특히 웅진시기에 백제 왕실에게 닥친 당면과제는 고구려의 위협을 피하며 국가체제를 재건하고 민심을 추스르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남제, 양 등 중국 남조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중국의 상장문화를 공식적으로 수용하였으리라 추정해볼 수 있다. 무령왕릉은 당시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였던 전축분과 큰 차이를 찾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하다. 이처럼 중국의 묘제가 원형에 가깝게 수용되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지석과 매지권 등 상장의 여러 요소를 아울러 갖추고 있다는 점은 주목 할 만하다. 중국 왕실의 상장문화를 수용한 배경은 대외적으로는 남조와의 친밀함을 보여주려 한 측면이 강하게 느껴지며, 대내적으로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백제 사회에 매지권이 수용될 수 있던 주요한 배경을 위와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찾아보았다. 다만 향후의 조사 성과에 따라 그 상한은 중국 문물이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한성시기 후반까지 소급될 여지를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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