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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의도 (한국문물연구원)
저널정보
동아시아문물연구학술재단 문물연구 문물연구 제15권 제15호
발행연도
2009.1
수록면
53 - 136 (8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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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묘에서는 청동시저와 가위가 출토되는데 필자는 이것이 북말(요)의 영향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번 논문에서는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중국에서 발간되는 [고고]와 [문물]에 보고된 송·요·금·원묘를 모두 정리하여 이들 묘에서 출토된 부장품 가운데 청동시저와 가위의 출토 경향을 분석하고 아울러 동전과 동경의 출토 경향을 밝혀 고려묘에서 출토되는 청동시저와 철제가위가 과연 어떤 배경에서 부장되게 되었는지 밝히고자 하였다. 우선 송묘~원묘까지 청동시저의 출토빈도가 가장 높은 시대는 전체 195기 가운데 21기에서 출토되어 약 11%를 상회하는 비율을 보이고 있는 요묘이다. 11%의 출토율은 자연멸실이나 훼손, 도굴 등을 감안하면 당시에 실제 부장되었을 가능성은 20% 가량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송과 남송시대의 분묘에서는 청동시저가 모두 19점이 출토되어 빈도수가 3%에 불과하고 원묘에서도 역시 3%대에 머물러 송대 이후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이것은 요묘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철제가위는 송묘는 11기, 원묘는 9기, 금묘 1기에 불과하고 원묘에서는 아예 출토 예가 없는데 비율로만 보면 요묘에서 높은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묘에서는 도제로 가위의 형태를 만들어 부장한 예가 있는데 이것은 가위에 대한 요대 사람들의 특별한 인식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전은 송묘에서는 30% 이상의 출토비를 보여주고 있지만 요묘에서는 18%에 불과하다. 금묘의 동전 출토비는 15.8% 정도지만 출토량이나 금전과 은전이 출토되는 상황은 남송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동전을 부장하는 풍습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다. 그리고 원묘에서 동전은 23.5%의 비율로 확인되어 원의 문화 기저에는 송의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동전을 부장하는 것은 송묘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고려묘에서 출토되는 동전은 송의 영향을 배제하고 생각하기는 어렵고 고려묘에서 동전이 출토되는 배경에는 송의 영향이 지대하다고 볼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동경은 송묘에서는 18%, 요묘에서는 14.3%, 금묘에서는 6.7%, 원묘에서는 15.5%로 금묘를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 비율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동전과 마찬가지로 송의 부장 양식을 요에서 받아들인 것이며 원은 그전까지 송대까지 확립된 전통이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송묘에서 보이는 동전과 동경의 부장이 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금과 원에도 계속하여 송의 전통이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고려묘에서 발견되는 동경이나 중국동전은 분명히 고려 자생의 부장풍습이 아니라 송에서 영향을 받아 시작된 것이거나 송에서 요나 금으로 전래된 풍습이 다시 고려로 전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청동숟가락은 요묘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며 그 비율도 가장 높아 청동시저를 부장하는 전통은 요에서 먼저 확립되었고 고려에서 청동숟가락을 부장하게 된 것은 요의 영향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또한 숟가락의 자루가 연미형인 것이 요묘에서만 출토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수렵이 주된 생활이었고 시저를 늘 가지고 다니던 요에서 청동시저를 부장품에 포함시키는 전통을 확립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편 철제가위 또한 현실적인 사용이 불가능한 도제 가위까지 제작하여 부장중에 포함시킨 예가 요묘에서만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묘에서 발견되는 철제가위는 요의 풍습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요와의 통교를 통하여 이러한 음식문화를 받아들이고 또한 장례문화도 받아 들여 청동시저를 부장품에 포함시키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며 한편으로 시기는 대개 11세기 전반경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고려초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이어 청동시저는 대단히 진귀한 식도구였고, 요와 송과의 통교를 통하여 그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을 것이며 사후에도 청동시저를 무덤 속으로 가져가는 전통을 확립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고려묘의 부장풍습은 중국동전과 동경의 출토예로 보아 송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청동시저는 요의 영향으로 보는 것이 출토 경향이나 요의 식생활로 보아 더욱 타당할 것이며 고려묘의 부장품은 요와의 공식적인 교류와 북송과 남송과의 실질적인 교류 결과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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