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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시가문학회 한국시가문화연구 한국시가문화연구 제26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55 - 79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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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봉 고경명은 1581(선조 14)년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사절단은 명나라에 태조 이성계의 잘못된 종계를 시정해 주도록 요구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이때 고경명은 서장관이었다. 그의 임무는 사절단의 여러 임무를 왕에게 보고하고, 사절단의 실질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것이었다. 사행 기간 그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극복하고, 많은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사행 기간 동안 쓴 고경명의 시는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만주를 지나 북경까지 갈 때 쓴 것들이다. 두 번째는 북경에서 사행 업무 동안 쓴 것들이다. 세 번째는 북경을 떠나 귀국할 때 쓴 것들이다. 그는 사행 기간 동안 64수의 시를 썼다. 만주를 지나가고 있을 때 쓴 시들은 이국적 정서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대표적인 시가 <분수령>과 <알문묘>이다. 분부령에서는 많은 사신들이 시를 지었다. 그곳은 휴식의 공간이면서 의미가 심장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요하로 들어가고,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경명은 <알문묘>에서 중국문화에 대한 엄청난 실망감과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보여주고 있다. 북경에 도착한 그는 외교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명나라의 비호의적인 처신과 엄격한 통제 때문에 활동에 애로가 많았다. 이때 그는 <예예부상서>와 <문성지불허강칙창음첩전운>이라는 2수의 작품을 썼다. 그는 이들 작품들을 통해 종계변무 외교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리고 그는 귀국길에 북경 근교에 있는 삼충사를 참배했다. 이 사원은 중국의 가장 위대한 충신인 제갈량, 악비, 문천상을 제향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고경명은 특히 문천상에 대한 감회를 토로하고 있다. 문천상은 의병을 이끌고 투쟁하며 죽을 때가지 원나라에 항복을 거부한 우국지사이다. 이 시에서 고경명은 문천상을 자신의 이상적 인물로 설정하고 있다. 귀국길에 고경명은 <칠가령제석집고구>라는 시를 짓고 있다. 이 시에서 그는 고국에서의 미래를 위한 강한 결단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귀국을 또 다른 환로의 출발로 삼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고경명에게 있어서 1581년에 있었던 명나라 변무외교 사행길은 인생의 큰 분수령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환로에서의 진로를 개척하고자 하는 욕망을 보이고 있고, 문천상과 같은 충신의 길을 걷겠다고 하는 삶의 좌표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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